한나라당 언론대책위(간사 고흥길 의원) 소속 의원들이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4월2일 노대통령은 국회 국정연설을 마친 뒤 청와대 기자실을 찾아와 서 전 사장 인선과정을 소상히 소개했다. 기자회견 내내 노대통령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무척이나 자존심을 다친 듯한 표정이었다. 평검사들의 집단 반발에 맞서 공개토론회까지 해가며 검찰 인사를 관철했을 때와 달리 꼬여만 가는 KBS 사장 인선 파문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날 저녁 노대통령은 KBS 노동조합 간부들과 시민단체 인사들을 청와대에 불러 토론을 벌였으나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서 전 사장의 사표를 수리하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됐다.
방송위 장악 땐 사장 임명 절대적 입김
대통령의 인사 실패라는 호재를 한나라당이 놓칠 리 없었다. 한나라당은 즉각 동원 가능한 인력을 모아 반격에 나섰다.
4월4일 오전 한나라당 언론대책위원회(위원장 하순봉·이하 언론대책위)는 당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KBS 사장 임명을 계기로 노정권의 언론정책에 맞서 본격적인 언론전쟁을 시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기자회견에서 한나라당이 내놓은 방송법 개정안의 핵심은 두 가지. 하나는 KBS 사장 임명 전에 국회 동의 절차를 거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통령의 방송위원 추천을 3인에서 1인으로 줄여 현행 9명인 방송위원을 7명으로 축소하겠다는 것. 한나라당은 개정안에 국회 추천 몫인 6명도 국회의장이 각 교섭단체의 대표위원과 협의하여 추천한 자로 하되, 한 교섭단체가 추천한 위원 수가 3인을 초과할 수 없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정리하자면 한나라당의 개정안은 대통령 추천 방송위원을 크게 줄이고 국회 추천 위원도 여당이 독점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국회 다수당이 방송위원의 다수를 임명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나라당 언론대책위는 이 같은 개정안을 4월15~16일 국회문화관광위(이하 문화관광위) 전체회의에서 처리할 계획이며 국회 통과도 강행한다는 방침이다.
한나라당의 이런 방침이 전해지자 여권은 ‘펄쩍’ 뛰었다. 민주당 문화관광위 간사인 김성호 의원은 “한나라당 안은 방송위원회(이하 방송위)를 국회가 구성하자는 것이고 KBS 사장을 국회에서 임명하자는 것인데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도 그런 식으로 의회가 방송을 장악한 사례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의 BBC나 일본의 NHK 같은 공영방송의 사장도 총리가 임명한다. 국회의 동의를 거치는 나라는 없다. 하물며 대통령제 나라인 우리나라의 공영방송사 사장을 국회 동의를 거쳐 임명한다는 것은 대통령제 골간을 무시하는 반헌법적 주장”이라고까지 몰아붙였다. 김의원은 이어 “한나라당 안대로라면 한나라당은 다수당으로 3명을 확보하고 현행 규정에 의해 한나라당 출신 국회의장 추천 몫인 1명을 더해 국회 추천 몫 6명 중 4명을 차지하겠다는 것으로 사실상 방송위를 완전 장악하겠다는 뜻이 아니고 뭐냐”고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4월2일 오전 춘추관 브리핑룸에서 한국방송공사 서동구 사장 선임과 관련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KBS 전경.
여야가 방송위 개편에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방송위의 방송사에 대한 영향력이 그만큼 막강하기 때문이다. 현재 방송위는 KBS 이사진에 대한 선임권을 갖고 있다. KBS 이사회에는 KBS 사장에 대한 추천권이 있기 때문에 방송위가 어떻게 구성되느냐는 곧 공영방송인 KBS의 정치적 성향을 결정짓는 잣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방송위는 또 MBC의 대주주로서 MBC 사장 선임권이 있는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 이사회 구성권과 EBS 사장 선임권도 갖고 있다. 따라서 방송위는 SBS와 지역민방을 제외한 모든 공중파 사장 임명에 결정적 영향력이 있는 셈이다. 역대 정권이 방송위에 대한 지배권을 놓지 않으려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런 방송위의 막강 권한을 알고 있는 탓에 민주당 내부에서는 “한나라당 개정안대로 된다면 그건 거대한 재앙”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동아 조선 중앙일보 등 거대 일간지들과 각을 세우고 있는 마당에 방송에 대한 대통령의 영향력마저 사라진다면 국정운영이 가능할지 의문”이라는 극단적 관측을 하는 이도 있다.
김성호 의원은 “한나라당이 진정 방송위의 독립성에 관심이 있었다면 꾸준히 문제를 제기했어야 옳다. 그런데 한나라당은 지난해 이회창 후보의 당선이 유력할 때는 방송위 구성에 대해 아무런 얘기도 없다가 노대통령이 당선되자 방송위의 공정성을 문제 삼고 있는데 이는 정략적인 태도”라고 지적했다.
민주 “한나라 뜻대로 되면 거대한 재앙”
이에 대해 고흥길 의원은 “지난해 8·8 재·보궐선거 이전까지 우리 당은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 원내 과반수가 안 되는 1당으로서 정부 여당이 반대하는 법안을 강행하기란 불가능한 것 아닌가. 그래서 안 한 것일 뿐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제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으니 본격적으로 방송법의 문제를 짚어가자는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과연 다툼은 어떻게 끝날까.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방송법 개정을 강행하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민주당도 호락호락 당할 수만은 없는 처지다. 방송의 절대적 영향력에 의지하고 있는 노정권으로서도 사활을 걸고 한나라당의 도전에 맞설 태세다. 기세등등한 양측의 태도로 봐선 일합이 불가피할 듯하다.
그런데 살기등등한 전장의 한편에선 묘한 기류도 감지된다. “설마 한나라당이 법개정을 강행하겠느냐”는 민주당측의 낙관론에, 한나라당 일각에서 “이제부터 협상하자는 얘기지 반드시 단독으로 처리하겠다는 뜻은 아니다”라는 선협상론이 감지된다. 큰 싸움인 만큼 신중하게 처리하려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튼 노정권 초반 최대 이슈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는 방송법 개정을 둘러싸고 여야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상대의 패를 엿보며 전장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는 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