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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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나이에 뿌리 박은 ‘홀로 아리랑’

1·4 후퇴 때 월남 한국인 터줏대감 김직연씨 … 자동차 정비→양계→슈퍼마켓 성공신화

  • 우길/ 여행작가 wgil2000@dreamwiz.com

    입력2003-06-26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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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나이에 뿌리 박은 ‘홀로 아리랑’

    아름다운 해안을 끼고 있는 엠파이어 호텔 전경.

    브루나이의 정식 명칭은 네가라 브루나이 다루살람. ‘평화의 나라’라는 뜻을 가진 이 나라는 100년 가까이 영국의 지배를 받다 1984년에 독립한 무슬림 왕국이다. 면적이 경기도의 2분의 1밖에 안 되고 국토의 75%가 열대 정글인 이 땅에 동남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석유(약 14억 배럴)가 매장돼 있는 것으로 확인된 데 이어, 최근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양의 석유가 새로 발견됐다. 또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양의 천연가스(14조 세제곱 피트)가 숨쉬고 있다. 전 국민이래야 34만명. 자자손손이 놀고 먹어도 걱정할 일이 없을 것 같은 나라가 브루나이다.

    현재 브루나이는 1968년 29대 술탄에 오른 하사날 볼키아가 다스리고 있다. 영국에서 유학한 그는 총리와 국방장관을 겸직하고 있으며 역대 술탄 중 최고라는 평을 듣고 있다. 엄격한 계급사회인 브루나이에서 술탄을 포함한 10남매와 그 직계가족은 ‘로열 패밀리’로 불리며 저택에 빨간색 기를 건다. 술탄의 왕궁에는 노란색 기가 걸려 있다. 술탄의 삼촌들과 그 직계가족들은 ‘제트리아’로 분류되며 저택에 분홍색 기를 내걸고, ‘뻔기란’이라 불리는 그 밖의 친척들의 저택에는 하늘색 기를 내건다.

    천연자원 ‘빵빵’ 1984년 독립한 무슬림 왕국

    브루나이를 먹여 살리는 석유와 천연가스는 모두 술탄의 소유다. 그 밖에 브루나이 유일의 항공사 로열 브루나이, 최고의 쇼핑센터 야야산, 손님보다 직원이 더 많은 엠파이어 호텔, 돼지고기를 안 먹는 무슬림들에게 쇠고기를 독점 공급하는 호주의 대규모 목장(브루나이 국토보다 넓다), 브루나이 최대 규모의 양계장, 심지어 벤츠 수입사까지도 술탄의 소유다. 브루나이 국민의 90%가 술탄과 로열 패밀리, 그리고 뻔기란이 소유하고 있는 기업에서 일하므로 ‘전 국민의 공무원화’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브루나이에 뿌리 박은 ‘홀로 아리랑’

    브루나이를 찾은 한국 해양대생들과 브루나이 교민들.

    한국인들이 한창 브라질로 농업이민을 떠나던 1960년대 중반, 한국 정부는 브루나이와도 농업협정을 맺어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브루나이로 한국인 12명을 보냈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 대림산업이 브루나이 LNG와 셸 본사 건물을 짓기 위해 이곳에 왔다. 1960년대 말부터는 유네코라는 송출회사가 해외개발공사를 대신해 브루나이로 한국인들을 보냈다. 현재 브루나이에 오래 거주한 한국인의 대부분은 이 무렵 입국한 사람들이다.



    한국인들이 브루나이에 도착하자마자 눈독을 들인 사업은 양계업이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브루나이 국민들은 유난히 닭고기를 좋아했다. 양계업이래야 처음에는 전기도 수도도 없는 정글에 판잣집을 짓고 수백 마리의 병아리를 사다 키우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름 모를 전염병으로 닭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어른 허벅지 굵기의 비단구렁이가 나타나 닭을 잡아먹는 등 어려움 속에서도 양계업은 번창했다. 80년대 한국인이 운영하는 양계장은 14개로 늘어났고 브루나이의 한 달 닭 소비량(10만 마리)의 80%를 공급할 정도가 됐다. 사실상 브루나이에 양계업이라는 사업을 탄생시킨 것은 한국인들이다.

    손재주 많은 한국인들이 생각해낸 또 다른 사업은 ‘워크숍’(이곳 한국인들은 자동차정비소를 이렇게 부른다). 망치 하나로 찌그러진 차를 펴내는 한국인들의 솜씨는 곧 소문이 났고 워크숍은 금세 10여개로 불어났다. 그 무렵 대림산업 소속 직원으로 이곳에 왔다가 눌러앉은 기술자들이 중심이 되어 소규모 건축업을 시작했다.

    뚜똥에서 아리랑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김직연씨(79)는 브루나이의 한국인 터줏대감이다. 김씨는 평양에서 태어나 인민군 장교로 한국전쟁에 참가했다 공산당이 싫어 1·4 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때 부인과 1남1녀, 그리고 처가식구 8명과 함께 길을 떠났으나 황해도 사리원 부근에서 상황이 급박해 “나중에 서울에서 다시 만나자”며 헤어진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서울에서 홀로 지내던 그는 1972년 인력송출회사를 통해 브루나이에 왔다.

    브루나이에 뿌리 박은 ‘홀로 아리랑’

    한인사회에서 존경받고 있는 아리랑 슈퍼마켓의 김직연씨 부부(가운데). 브루나이 한인회장 이광규씨 부부. 이스타나궁을 빠져나오고 있는 술탄 탄 자동차(왼쪽부터).

    그가 처음 한 일이 워크숍. 하지만 한인들 간의 경쟁이 너무 치열해 이내 그만두고 병아리 500마리를 사서 양계업을 시작했다. 북한에서 아마추어 권투선수 생활을 한 김씨는 5년 동안 닭 잡아먹는 뱀을 잡고 각종 전염병과 싸운 끝에 숭가이 똥글리안 지역 1만3200여평의 땅에 육계 2만 마리, 산란계 2만 마리를 키우는 브루나이 최대의 양계장을 일구어냈다.

    그러나 김씨에게 뜻밖의 불행이 찾아왔다. 재혼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3남2녀 가운데 막내딸을 교통사고로 잃고, 막내아들마저 한인단합대회에서 씨름하다 목을 다치는 바람에 휠체어를 타는 신세가 됐다. 김씨는 아들의 치료를 위해 한국에 갔다 5년 만에 돌아와 이곳에 슈퍼마켓을 차렸다.

    85년 무슬림 메카 순례를 마치고 세례를 받은 김씨는 매일 새벽 뚜똥의 바닷가를 산책하며 여생을 즐기고 있다.

    다행히 김씨 곁에는 든든한 사위 이광규씨(41)가 있다. 현재 브루나이 한인회장인 이씨는 건설회사 엔지니어로, 86년 5월 입국했다. 브루나이 이스타나 왕궁과 공항의 확장공사를 맡아 브루나이에 왔으나 1년 뒤 회사가 부도나 돌아갈 길이 막막해졌다. 한국으로 돌아갈까, 브루나이에 남을까를 고민하던 그는 브루나이 정글이 건물들로 가득 차는 날을 꿈꾸며 현지인의 명의를 빌려 건축업에 뛰어들었다. 한때 인도네시아 노동자를 180여명이나 고용하고 연 59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꽤 괜찮은 사업이었다. 하지만 브루나이 술탄의 셋째 동생이자 재무장관이던 제프리 하사날이 제루동 파크, 엠파이어 호텔 공사 등을 추진하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국가예산을 탕진하고 98년 파산하는 바람에 그의 꿈도 날아갔다. 하청을 받았다가 망한 수많은 사람 중에 이씨도 끼여 있었던 것이다. 차를 몰고 브루나이 동쪽 끝 무아라 항구로 달려가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려던 그는 항구 끝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렇게 죽을 바에는 한 번만 다시 해보자’고 결심한 이씨는 브루나이 시민권자인 김직연씨의 큰딸 승희씨와 결혼해 부인 명의로 건축업을 다시 시작했다.

    청소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최영준씨 활약

    “그때 한국으로 돌아갈까 했지만 정글을 바라보며 크게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요즘 브루나이 경기가 엉망입니다. 이 작은 땅에 웬만한 것은 다 지었으니 건축경기도 이제 끝이죠.”

    이씨는 브루나이 사람들이 즐겨 하는 “볼래, 볼래”(된다, 된다)와 “뚱그, 뚱그”(기다려, 기다려)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도 어느새 브루나이 사람이 된 것이다.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 중에는 2001년부터 브루나이 청소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있는 최영준씨(38)와 브루나이 농림부 국장과 결혼한 이성남씨도 있다. 최씨는 연세대를 나와 LG와 현대팀에서 9년간 수비수로 활약한 뒤 4년간 코치 생활을 하다 브루나이 문화체육부 초청으로 입국했다. 2년 계약으로 월급 3000달러와 집, 차량유지비 등을 제공받고 있다. 그는 “선수들을 지도하다 보면 소리도 지르고 화도 내게 되는데 여기서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며 웃는다. 한번 소리를 지르면 다음날 선수들이 아예 연습장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브루나이에 뿌리 박은 ‘홀로 아리랑’

    라삐에서 바라본 정글.

    이성남씨(44)는 서울의 한 호텔에서 근무하다 손님으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고 사귄 지 3개월 만에 결혼해 브루나이에 왔다. 그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손님은 브루나이 출신으로 호주에서 유학한 하지 유섭 박사였다. 1983년 10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11월 브루나이에서 다시 한번 식을 올렸다. 결혼식이 있기 일주일 전부터 매일 쌀가루로 전신 마사지를 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니카의식’이라는 부부선언을 한 뒤 열흘 동안 매일 1000~2000명의 하객을 초대해 파티를 여는 브루나이 전통에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 한 결혼이 벌써 20년째. 어느새 이성남보다 유실라라는 무슬림식 이름이 더 익숙하다. 2남2녀를 두었고 농림부 국장인 남편의 월급 6700여만원과 부부 소유의 건물 3채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전형적인 브루나이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다.

    “남편이 술, 담배를 안 하고 가정적이어서 좋긴 하지만 까다로운 편이라 그동안 자주 싸웠죠. 한국에서라면 이혼했을지도 몰라요. 부부싸움 하고 비행기표 사러 갔다가 풀려서 다시 돌아오곤 했지요. 지금은 아이들이 커서 제가 눈물이라도 흘리면 슬그머니 옆에 앉아 코란을 읽어주곤 해요.”

    한국에서 스튜어디스로 일하다 왕비의 남동생과 결혼해 왕족이 된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 김영주씨(46)와의 인터뷰는 끝내 하지 못해 아쉬움을 안고 다음 행선지인 싱가포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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