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중부 바간의 탑들.
그러나 한때 번창했던 봉제업도 미얀마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사양길에 들어섰다. 서방세계가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미얀마 군부독재에 대응해 강력한 경제제재 조치를 취함으로써 ‘메이드 인 미얀마’ 상품의 수출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미얀마한인회 김권수 회장(63)은 7년 동안 홍콩에 본사를 둔 봉제공장 책임자로 일했지만 일감이 끊겨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2~3년 전만 해도 주문이 밀려 신이 나서 일했는데 이제는 견딜 재간이 없어요. 미국이나 유럽에서 미얀마 물건을 사지 말라는 법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소비자단체가 나서서 미얀마의 인권이나 불법노동을 문제 삼아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어 판로를 뚫기가 어렵습니다. 국제노동기구에서는 아예 미얀마 물건에 대한 수입금지 법안을 상정해둔 상태죠. 이대로 가면 미얀마의 장래가 아득합니다. 하지만 서방의 제재조치만 풀리면 미얀마는 황금의 땅이 될 겁니다. 모두들 그때만 기다리고 있어요.”
수도 양곤에 한국인 900여명 거주
주식회사 ‘대하’의 하준화, 편세화씨 부부.
월급쟁이 생활을 할 때는 월세 3300달러짜리 고급주택에 살았지만 독립 후에는 무조건 지출을 줄여야 했다. 하씨 가족(하씨 부부와 1남1녀)은 월세 500달러짜리 2층 건물을 얻어 1층은 사무실로 쓰고, 방 두 칸짜리 2층은 살림집으로 썼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아내 편씨가 사무를 보았다. 처음 넉 달 동안은 주문을 한 건도 받지 못해 애를 먹었다. 바이어들이 하씨를 믿어주지 않았던 것.
그러나 ‘불도저 사나이’ 하씨는 6개월 동안 바이어들을 쫓아다니며 설득, 중국계 바이어에게 말레이시아산 플라스틱 제품을 파는 데 성공했다. 첫 실적의 대가는 수수료 1400달러.
일단 말레이시아산 플라스틱 제품으로 물꼬를 트자 주문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철강제품, 화학제품, 한약재를 수입하려는 큰손과 연결되면서 그의 사업은 본궤도에 올랐다. 그 바이어와 일한 지 8개월 만에 월세 900달러짜리 건물로 이사했다.
하씨는 성실함과 제품 하나하나 꼼꼼히 챙기는 완벽주의로 단 한 건의 클레임 없이 1999년 200만 달러, 2002년에는 800만 달러의 판매실적을 올렸다. 독립한 지 3년 만인 2001년 12월 드디어 제대로 된 살림집을 마련했다. 미얀마에서 가장 좋다는 골프장 내 주택개발지구에 700평의 땅을 사 본채 150평, 별채 30평짜리 고급주택을 지었다. 땅값 20만 달러 외에 건축비만 25만 달러가 들었다. 사무실도 미얀마 최고의 호텔인 세도나호텔 3층으로 옮겼다.
미얀마에서는 인터넷도 콜렉트콜도 기대하기 어려울 만큼 통신여건이 좋지 않다. 거리에서 돈을 받고 전화를 빌려주는 사설 공중전화. 양곤의 시내버스. 꽃 파는 가족의 다정한 모습. (위부터)
하씨는 미얀마에서 사업을 하려면 미얀마의 풍토와 국민성을 이해하려는 자세, 그리고 무엇보다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낙천적 국민성 인내심 필요”
“미얀마 사람들은 불심이 워낙 두터워 돈 욕심 내지 않고 수도하듯 순리대로 살아갑니다. 세상에 둘도 없이 착하고 순박한 사람들이지만, 안타까울 때도 많아요.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고 군부독재 하에 있다 보니 힘 있는 자의 눈치를 보죠. 사장이 보는 앞에서만 열심히 일해요.”
하씨는 미얀마 바이어와 물건 단가 문제로 협상을 벌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기도 했다. 거액의 월급을 받는 미얀마인 매니저가 회사측에 유리하도록 협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얀마인 바이어 편을 든 것. 이들에게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보다 같은 미얀마 사람이라는 동족의식이 우선한다. 심지어 외국인은 돈이 많으니까 미얀마 사람에게 돈을 많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아무 말 없이 출근을 하지 않는 경우도 예사다. 하씨도 처음에는 이런 미얀마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알고 보니 너무 미안해서 차마 그만둔다는 말을 못 하겠으니까 그냥 안 나와버린 거더라고요. 이런 미얀마 사람들의 특성을 파악하면 사업 하기가 훨씬 쉬워요.”
거리에서 쌀국수 모힝가를 파는 모자. 아이의 얼굴이 하얀 것은 다나카라는 나무분을 발랐기 때문이다.
하씨는 상대 운전자가 보고 있는 앞에서 자신의 운전기사를 해고했다. 그러자 정말 둘 사이에 협상이 시작돼 금세 5000차트(약 5000원)에 합의를 보았다. “이젠 어떻게 해야 돼? 우리 운전기사가 불쌍하잖아.” “일단 회사로 가서 다시 고용하세요. 그럼 돼요.” 30분 후 하씨는 운전기사가 낸 합의금 5000원을 주고 다시 그를 고용했다. 이처럼 미얀마는 알쏭달쏭한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