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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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팩션 기지개

  • 출판칼럼니스트

    입력2006-10-16 12: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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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형 팩션 기지개
    미스터리 장르는 국내에서 일부 마니아 독자들만 찾아 읽을 뿐 대중 독자는 좀처럼 흥미를 보이지 않는 ‘저주받은’ 분야 중 하나다.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미스터리 장르를 어린 시절에 한번 보고 그만두는 유치한 장르로 폄하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국내에 작가군이 형성돼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 추리소설은 다르다. 국내 독자들은 유난히 역사 추리물만은 즐겨 읽는다. 최근 개정판이 나온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도 1990년대 초 출간돼 100만 부가 넘게 팔린 역사추리물이다.

    최근 역사추리 장르가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다. 훈민정음 반포를 앞두고 일어난 집현전 학사들의 연쇄 살인사건을 통해 당시 조선의 권력투쟁과 그 이면을 그린 소설 ‘뿌리 깊은 나무’(전 2권)가 출간 석 달 만에 10만 부를 넘어섰다.

    물론 이런 역사 추리소설 붐에 불을 지핀 건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얻었던 ‘다빈치 코드’다. 팩션(팩트+픽션)이라는 보통명사로 불리는 ‘다빈치 코드’는 다른 말로 하자면 역사 추리소설의 21세기 버전이다. 혹자는 지식소설이라고도 하는데, 에코의 ‘장미의 이름’ 같은 유형이 이 범주에 든다. 물론 과거 역사추리물과 현재의 팩션은 다르다. ‘장미의 이름’ 같은 과거의 역사 추리소설은 문학적 성취를 위해서 혹은 메시지나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 추리라는 기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다빈치 코드’를 비롯한 최근의 팩션은 소설이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역사를 빌려다 쓰는 형식이다. 그러니까 소설의 진실성 확보를 위해 역사와 추리가 동원되는 형식이니 주종이 바뀐 셈이다.

    ‘다빈치 코드’의 성공 이후 번역서뿐만 아니라 우리 작가들의 팩션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이런 소설을 선보였던 김탁환을 제외하면 새로운 작가들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팬터지소설 등 장르소설의 경험이 있는 작가들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팩션을 시도했으나 지식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성취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한국형 팩션은 작가의 역량이 쌓이기까지 더 기다려야 할 모양이라고 체념하고 있던 차에 소설 ‘뿌리 깊은 나무’가 출간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일단 소설적으로도 보통 이상의 재미를 선사한다. 찰스 디킨스가 ‘안 풀린다 싶으면 사람을 하나 죽여라’라고 했던가. 훈민정음 반포 7일을 앞둔 당시의 긴박감을 살리기 위해 집현전 학사들이 연달아 살해되고, 죽음을 통해 당대의 갈등과 만나는 구성 또한 매력적이다. 여기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지녔던 예술의식이나 철학과 과학적 정신 등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교양을 풍부하게 전달하고 있어 한국형 팩션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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