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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 신화, 낯 뜨겁게 몰락

  • CBS 노컷뉴스 방송연예팀 기자 socio94@cbs.co.k

모래시계 신화, 낯 뜨겁게 몰락

모래시계 신화, 낯 뜨겁게 몰락

방송이 무기한 미뤄진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주인공 담덕 역의 배용준.

“30년 드라마 연출 생활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민망한 상황을 맞았다.” 6월8일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연출자 김종학 감독이 방송 지연에 대한 사과 기자회견을 가졌다. 30년간 현장을 누벼온 드라마의 거장은 이날 군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일선 드라마 예능 시사교양 연출자들은 김 감독이 자존심을 접어가며 어렵게 토해낸 ‘수치스러움’에 주목했다. 방송 연출자(프로듀서·PD)로서 가장 부끄러운 상황은 바로 방송을 제 날짜에 대지 못하는 것이라는 데 공감하기 때문이다.

연출자들 사이에는 금과옥조 같은 불문율이 있다. 제아무리 잘 찍고 예술적으로 만들었다 해도 ‘편성 시간에 방영되지 못하는 방송물은 의미가 없다’는 것. 조금 성기고 부족하더라도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 방송물의 운명이다.

김종학 PD, ‘태왕사신기’ 네 번째 방영 연기 군색한 변명

예컨대 시청률이 3%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어느 연출자가 그 드라마를 계속 찍고 싶겠는가. 좀더 손질해서 때깔 좋고 캐릭터 살고 주목받을 만한 드라마를 내놓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와의 약속 때문에 방송은 제 날짜에 나가야 한다. 이 약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연출자는 없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편성’이라는 족쇄에서 자유롭고자 했다면 김 감독은 드라마가 아닌 영화를 찍었어야 했다. 물론 영화감독도 자신의 작품이 1년 중 언제 어떻게 극장에 걸리는지를 놓고 골머리를 앓지만, 드라마 연출자보다는 덜 구속받기 때문이다. 멋진 석양을 담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이 영화감독이라면, 드라마 연출자는 석양을 대신할 대안을 찾아내 극의 흐름을 이어가는 감각이 필요하다.

백 번 양보한다 한들 네 차례에 걸친 김 감독의 ‘방송 날짜 미루기’는 양치기 소년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최종 결과물을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변명이 투자자, 방송사, 시청자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지 의문이다.

기자회견에서 확인된 김 감독의 한류강박증도 사람들을 실망케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태왕사신기’에는 한류 원조스타 배용준이 참여하고, 많은 해외 투자자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방송을 기다리는 나라만도 족히 90여 개국에 달한다.

그러나 “배용준과 함께 꺼져가는 한류의 불을 다시 지피겠다”는 그의 다짐은 공허하게만 들린다. 섣부른 영웅심리 또는 강박관념 정도로 보여질 수도 있다.

김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 MBC의 부장급 이상 드라마 연출자들은 잘 안다. 80년대, 빠듯한 제작비와 촉박한 제작일정이라는 한계 속에서도 ‘동토의 왕국’ ‘북으로 간 여배우’ 같은 작품을 만들고 흥행에도 성공한 그의 현장 장악력, 추진력, 연출력은 더 이상의 검증이 필요 없을 정도다. 게다가 그는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백야 3.98’ 등을 통해 가장 성공한 드라마 연출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모래시계 신화, 낯 뜨겁게 몰락

‘태왕사신기’의 주역들. 프로듀서 브리딧 매리부르크, 송지나 작가, 김종학 감독, 배우 배용준, 음악담당 히사이시 조(왼쪽부터).

그러나 이번 기자회견을 지켜본 방송 관계자들은 적잖이 실망했다. KBS의 한 중진 PD는 “언제 우리가 한류를 의식해 드라마를 만들었나. 한류의 시발점인 ‘겨울연가’가 한류를 겨냥해 만든 것이었나. 우리의 드라마 작업은 시청자에게 감동과 재미를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라며 그의 회견 내용을 꼬집었다.

또 MBC의 한 고참 PD는 “연출자로서 김 감독의 현장 장악력이 떨어진 게 가장 큰 문제점으로 보인다”며 “과거의 그였다면 결코 이런 상황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연출자 이상의 고민이 지나치게 많아 작품에만 집중하지 못해 생긴 일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주간동아 2007.06.26 591호 (p84~85)

CBS 노컷뉴스 방송연예팀 기자 socio94@cbs.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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