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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떠나도 음악 떠날 수 있나요”

은퇴공연 갖는 록음악 대부 신중현 “전원생활 하며 대중음악 인터넷 강좌 계획”

  • 송문홍 기자 songmh@donga.com

“무대는 떠나도 음악 떠날 수 있나요”

“무대는 떠나도 음악 떠날 수 있나요”
12월13일 오후 서울 사당동의 허름한 지하연습실. 비좁은 공간에서 7, 8명의 젊은이들이 음악을 연주한다. 그 틈에서 신중현(66) 씨가 기타를 멘 채 노래를 부르고 있다. ‘빗속의 여인’ ‘봄비’ ‘미인’ ‘님아’ 등 대한민국의 중장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흥얼거렸을 바로 그 노래들이다.

신씨와의 인터뷰는 어렵게 이뤄졌다. 12월17일로 예정된 은퇴공연 준비 등 이런저런 일들로 그가 워낙 바빴기 때문이다. 신씨는 이 날 오후 연습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다. 기자로선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한국 록의 대부’가 기타 치고 노래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구경할 수 있으니까.

연습실은 좁고 답답했다. 이런 곳에서 신씨 같은 대가가 연습을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막내아들뻘 되는 젊은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직접 기기를 손보는 모습도 신선했다. 그런 그에게서 50년간 쌓아온 연륜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지만, 60대 후반이라는 ‘나이’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젊은 사람들과 작업하니까 늙지 않으시겠어요.

“마음이야 항상 젊죠. 10대처럼.”(웃음)



- 어떤 자료를 봤더니 최근 기타 연주주법을 바꿨다고 하던데, 아까 연습할 때는 네 손가락을 모두 쓰시더군요.

“아니에요. 약지를 쓰지 않고 세 손가락만으로 연주해요. 겉으로는 다 쓰는 것처럼 보여도…. 나이를 먹고 힘이 달리다 보니 노래도 예전과 달리 기교를 넣어 부르게 되더라고요.”

신중현은 50년대 미 8군 무대를 통해 데뷔했다. 1962년에 결성한 국내 최초의 그룹 ‘에드포’를 정식 데뷔 시점으로 쳐도 44년.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수많은 명곡을 썼고 펄시스터스, 김추자, 장현 등의 가수를 길러냈으며, 한국 록의 정신적인 지주로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다.

“나이 들어 힘 달리니까 기교 부리게 되더라고요”

최근 영화 ‘라디오스타’에서 신중현의 음악을 소개한 영화감독 이준익 씨는 지난달 ‘동아일보’ 지면에 “초등학생 시절 노래를 부를 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노래를 불렀다”며 “‘라디오스타’는 20여 년간 명멸한 한국의 로커들에게 바치는 나의 오마주(homage·경의)”라고 썼다. 지난달 심야 음악방송에 나온 그를 가리켜 가수 윤도현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이라고 소개했다. 이 모두가 평생 음악 외길을 걸어온 노장(老將)에 대한 경외감의 표현이다.

“무대는 떠나도 음악 떠날 수 있나요”
- 요즘 방송에도 자주 나가고 굉장히 바쁘시더군요. 이러다가 은퇴공연 뒤에도 계속 활동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을 거예요. 요즘은 은퇴한다고 하니까 여기저기에서 불러주는 것뿐이에요. 공연 끝나고 나면 금세 잊혀질 거예요.”

그는 서울 근교에 전원주택을 짓는 등 은퇴 준비를 해왔다. 그곳에서 인터넷 대중음악 강좌를 열겠다는 계획도 세워놓았다. 그는 “요즘 미국에서 음악을 배워오는 사람이 늘어났지만, 한국적인 음악성과 현대 대중음악의 기초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며 “예컨대 록의 화성학 이론을 정리해서 필요한 사람들이 들어와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 은퇴에 대비해 돈은 많이 벌어놓았나요?(웃음)

“돈을 보고 음악을 시작한 게 아닌 데다 음악에 미쳐 살아오다 보니 돈에 대한 개념이 없어요. 예전엔 우리나라에서 음악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애당초 그른 일이었고…. 노후 대비가 중요하기는 한데, 가난에 워낙 익숙해서 그런지 별로 걱정되진 않아요.”

- 최근 어느 인터뷰에서 ‘록의 본질은 저항이 아니라 자유다’라는 말을 하셨더군요.

“록음악은 20세기에 들어와 탄생한 새로운 장르예요. 20세기는 지역적으로 다양한 문화들이 장르별로 융합되는 시기였죠. 이런 분위기에서 전자악기를 쓰고 컴퓨터를 활용하는 록음악이 문화 교류의 매개 구실을 한 거예요. 옛날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교류하는 가운데 록음악이 성장한 거죠. 일각에서 팬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저항’이라는 말을 끄집어내기도 했지만, 록의 근본은 자유에 있어요.”

- 하지만 박정희 권위주의 시절, 그 억압된 분위기에서 많은 명곡을 쓰셨잖아요? 그런 점에서 좋은 환경에서 반드시 좋은 음악이 나오는 건 아닌 듯한데….

“그래요. 자극이 있어야 좋은 음악이 나오니까…. 제 경우엔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자극으로 점철된 길을 걸어왔어요. 그에 비해 요즘 세대는 지나치게 귀엽게만 자라서 그런지 음악에도 굴곡이 없는 것 같아요. 사람은 고생도 좀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음악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1975년 당국으로부터 활동 금지 조치를 당했던 때를 꼽았다. 잘 알려진 대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 찬가를 만들라는 정권의 지시를 거부해 미움을 산 데다 대마초 사건까지 겹쳐 음악인으로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 그는 당시엔 “음악을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제가 미 8군에서 활동할 때엔 국내에 대마초라는 게 없었어요. 그런데 1968년 미국에서 베트남전 반대데모를 하던 히피 청년들이 미 8군을 통해 국내에 들어오면서 대마초와 각종 마약류를 갖고 왔죠. 그들을 만나면서 사이키델릭 뮤직, 즉 환각음악에 대해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대마초를 해봤어요. 그런데 그걸 한 상태에선 음악이 안 나오더라고요. 맑은 정신도 유지할 수 없고. 그래서 손을 끊었는데, 그 미국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선물이랍시고 제게 대마초를 한 아름씩 안겨주고 간 거예요. 음악 하는 후배들이 그걸 달라고 해서 나눠줬다가 나중에 당국에 끌려가 고문도 참 많이 받았어요.”

그는 당시 “대마초에 대해 아느냐”고 묻는 기자들에게 “우리 집 방 안에 굴러다닌다”고 대답했다며 웃었다. ‘대마초를 피우고선 좋은 음악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의 잡지 기고문도 썼다고 한다. 그 와중에 청와대와 공화당의 요구를 거부했고, 그것이 빌미가 돼 결국 활동정지 처분을 받았다는 것.

- 자제 분 셋이 모두 음악을 하는데, 어떻습니까.

“저야 좋지요, 뭐. 그 아이들의 음악이 상업성이 떨어지는 게 걱정이라면 걱정인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상업성만 따진다면 진정한 음악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어요.”

- 부인도 국내 최초의 여성 드러머였다고 들었는데….

“미 8군에서 처음 만났어요.”

- 가족 콘서트라도 한 번 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이고, 집사람은 기운이 빠져서 이제 못해요.”

영화감독 이준익 씨는 신중현에 대해 “음악적 테크닉도 훌륭하지만 기질이 더 멋있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고교 때는 클럽 연주자를 찾아가 막무가내로 오디션을 보게 해달라고 졸랐고, 가르쳐주겠다고 하자 그 이튿날 학교를 때려치웠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고민할 시간에 연습하고, 망설일 시간에 몸을 던지는 사람이다. 3월에 만났을 때도 스스로 실천한 인간의 파워가 눈빛에 그대로 드러났다. 정말 멋졌다….”(‘동아일보’ 2006년 11월4일자)

어렸을 적 영등포역 앞 악기점에서 구입한 기타에 딸려온 악보로 독학을 시작해 한국인의 정서를 록음악에 용해시킨 신중현, 그는 이런 헌사(獻辭)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주간동아 565호 (p54~55)

송문홍 기자 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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