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8

2006.10.31

영국 ‘다문화주의’ 는 사회 분열 시한폭탄?

이슬람계 잇단 테러 연루 이후 회의감 고조 … 여성 얼굴 가리는 ‘니캅’ 반대 목소리 높아져

  • 코벤트리=성기영 통신원 sung.kiyoung@gmail.com

    입력2006-10-30 13: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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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인은 독일제 차를 타고 아일랜드 퍼브에 가서 벨기에 맥주를 마신 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인도 카레나 터키 케밥을 먹고, 집에 돌아와서는 스웨덴 소파에 앉아 일본 텔레비전으로 미국 TV 프로그램을 본다.”

    영국이 자국 문화의 개방성과 관용성을 자랑할 때마다 내세워 온 ‘다문화주의’를 영국인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과거 식민지 경영의 경험과 영연방 국가들을 이끄는 맹주로서의 지위가 영국으로 하여금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외국 문화와 관습에 포용적 태도를 갖게 만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해 7·7 런던 테러에 이어 올해 히드로 공항 테러 음모 적발 사건 등에 하나같이 영국에 살고 있는 이슬람 주민들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러한 다문화주의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영국의 자랑스런 유산이 오히려 영국 사회의 분열을 가속화하는 시한폭탄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논란에 불을 댕긴 사람은 잭 스트로 전 외무장관이었다. 집권 노동당 내에서도 중진으로 꼽히는 잭 스트로 전 장관은 10월 초 한 지방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지역구의 이슬람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얼굴 전체를 가리는 ‘니캅(Niqab)’을 벗도록 권고했다”고 밝히면서, 이슬람 복장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는 이 베일이 편안한 대화를 가로막는다고 꼬집었다.

    블레어 총리 등 정치인들 니캅 반대에 가세



    지난해 런던 테러 이후 안 그래도 ‘테러 세력’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던 영국 내 이슬람 주민들이 잭 스트로 장관의 발언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이슬람 단체들은 그의 발언이 종교 차별이라며 스트로 장관의 지역구 사무실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고, 노동당의 동료 각료들조차 ‘부적절한 발언’이라며 스트로 장관에 대한 비판에 동참했다.

    차기 노동당 부당수 자리를 노리는 스트로 장관은 궁지에 몰리는 듯했다. 그러나 논란이 확산될 기미를 보이자 그는 오히려 BBC 라디오에 나와 ‘이슬람 여성들의 베일이 영국 사회의 통합을 저해한다’며 신중하면서도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러자 일순간에 영국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 논란에 가세했고, 언론들은 언론들대로 경쟁적으로 ‘베일 논란’에 불을 붙였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이번 논란에 기름을 붓는 사건들이 잇따르기도 했다. 스트로 장관의 발언이 알려진 다음날 리버풀에서는 한 백인 청년이 이슬람 여성이 쓰고 있던 니캅을 찢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고, 며칠 뒤 듀스베리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이슬람 출신의 보조교사가 교실에서 니캅을 벗으라는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교육청으로부터 정직 처분을 받았다. 이슬람 단체들은 이러한 사건들을 놓고 다문화주의를 표방해 온 영국 사회가 이슬람을 이웃이 아니라 적으로 간주하는 증거라며 연일 규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영국 사회에 개인의 종교적 정체성과 사회적 통합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느냐는 무거운 화두를 던진 이번 사태는 2년 전 프랑스의 한 학교에서 벌어졌던 ‘히잡(Hijab)’ 논란과 여러모로 닮았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끌고 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사회적 통합의 중요성을 내세워 학생들이 교내에서 종교적 상징물을 착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했고, 일선 교사들도 이에 따라 교내에서 이슬람 여성들이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인 ‘히잡’ 은 물론 유대교와 기독교의 종교 상징물의 착용도 금지했다. 그러나 일부 이슬람 여학생이 ‘히잡’을 벗으라는 교사의 지시를 거부해 끝내 퇴학 조치를 당하자 프랑스 사회는 ‘문화의 다원성과 사회 통합’을 놓고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영국에서 벌어진 이슬람 복장 논란은 교육계나 여성계에서 불거진 것이 아니라, 집권당 중진 정치인이 직접 나서 불씨를 던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진다. 국민들의 종교적 신념과 결부된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동안 영국 정치인들에게는 금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노동당 정부에서 장관을 두 번이나 지낸 베테랑 정치인이, 그것도 유권자의 4분의 1이 이슬람 출신인 블랙번을 지역구로 두고 있는 잭 스트로 장관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영국 정가에서는 스트로 장관이 런던 테러와 히드로 공항 테러 음모 적발 사건을 계기로 영국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반(反)이슬람 정서를 등에 업고 계산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러한 기류를 반영한 것일까. 잭 스트로 장관의 발언이 평지풍파를 일으킨 며칠 후 차기 총릿감으로 거론되어 온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도 ‘법률로 강제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토론이 필요한 문제’라며 사실상 스트로 장관을 두둔하고 나섰다. 브라운 장관은 그동안 영국 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대해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로 완곡한 불만을 내비쳐 왔다.

    이번에는 급기야 토니 블레어 총리까지 나서서 “이슬람 여성들의 베일은 이슬람과 비이슬람을 나누는 분열의 표시이며 이슬람 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며 논란에 뛰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블레어 총리는 니캅을 벗으라는 지시를 거부한 데 대해 정직 처분을 내린 듀스베리 교육청의 결정을 명시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브라운 장관과 블레어 총리의 가세로 논란은 진정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확산일로를 걷고 있다.

    문화 공존은 더 이상 자랑거리 아니다?

    영국 내 이슬람 주민은 줄잡아 150만 명. 이슬람계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치권이 직접 나서 ‘종교 자유의 침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영국 내 이슬람 세력들이 주도한 두 차례에 걸친 대형 테러 사건이 영국인들에게 남긴 정신적 충격 때문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영국인들은 런던 테러와 히드로 공항 테러 음모 사건의 범인들이 대부분 영국에서 나고 자란 이슬람계 영국인들이라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피부색과 영어 억양은 다르지만 동네에서 스스럼없이 마주치며 눈인사를 건네온 이웃들이 끔찍한 살인 테러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그들은 경악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자녀와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성장해 피자집 배달원과 세탁소 종업원 등으로 평범하게 살아왔던 이들 이슬람계 주민들이 어느새 테러리스트로 변해 있다는 사실에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그 후 영국의 주류 사회에서는 점점 이질적 문화의 공존이라는 전통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보다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문화적 거리감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는 지식인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 부쩍 사회적 통합을 떠받치는 핵심 요소로서 공통의 ‘가치’와 공통의 ‘언어’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영국에 살면서도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슬람의 관습과 문화를 그대로 유지한 채 영국과 영국인에 대한 적대감만 키워가는 일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다문화주의라는 전통 아래 계속 영국 사회의 일원으로 포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지도층은 그들이 자랑해 온 ‘다문화주의’가 문화의 통합을 촉진하기보다는 오히려 분열을 조장한 것 아니냐는 테러 희생자 가족들의 물음에 어떤 형태로든 답을 내놓아야 할 형편이다. 따라서 영국인들에게 런던 테러의 기억이 잊혀지기까지 답을 찾기 위한 고민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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