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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교양 돋보기|다빈치 유년의 추억

어머니만 바라본 수동적 동성애자

서자로 태어나 성장, 다른 여성에 냉담 … 자신의 스튜디오 늘 미소년으로 채워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어머니만 바라본 수동적 동성애자

“유년기의 첫 기억들. 솔개는 요람 속에 있던 나에게로 날아와 꽁지로 내 입술을 열고 입술 사이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최근에 번역된 ‘레오나르도 다빈치 노트북’을 읽다가 이 낯익은 구절과 마주쳤다. 이 구절이 유명해진 이유는 물론 프로이트 때문이다. 이 정신분석학자는 다빈치의 첫 기억에서 그의 동성애적 경향을 읽는다. 이탈리아어에서 ‘꼬리(coda)’는 동시에 ‘성기’를 뜻한다. 따라서 새가 꽁지를 입술에 넣는 행위는 펠라치오의 환상이라는 것이다.

수동적 동성애

어머니만 바라본 수동적 동성애자

두 성녀와 아기 예수

다빈치가 여인을 가까이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남아 있는 그의 언급은 그가 여성과의 접촉을 강하게 거부했음을 시사한다. “성행위나 그와 관련된 것은 너무 역겨워서 인간을 그리로 이끄는 예쁜 얼굴과 관능적 성향이 없다면, 인류는 곧 멸종하고 말 것이다.” 1476년, 스물네 살의 다빈치는 일곱 살의 어린 모델 자코포 살타렐리와 동성애를 한 혐의로 고소된다. 이 고소 사건은 결국 유력자였던 소년의 아버지의 개입으로 ‘무혐의’로 종결된다.

다빈치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늘 미소년으로 채웠다. 그중에서 그와 각별한 관계를 맺은 소년은 지안 자코모 카프로티. ‘예술가 열전’의 저자 바사리는 그가 “고운 곱슬머리를 가진 우아하고 아름다운 젊은 소년이었다”고 증언한다. 도둑질과 거짓말을 밥 먹듯 해 ‘살라이노(작은 악마)’라 불렀지만, 다빈치는 이 행실 나쁜 아이를 내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곁에 두었다. 다빈치와 각별한 관계를 맺었던 또 다른 소년은 프란체스코 멜치. 그는 훗날 다빈치가 자신에 대해 “매우 정열적이며 타오르는 사랑을 갖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렇다면 다빈치는 이 소년들과 같이 잤을까? 프로이트는 그 가능성을 부정한다. “레오나르도와 젊은 제자들의 다정한 관계가 성행위로까지 진전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다빈치 같은 이는 “헌신적으로 사랑을 할 때의 그 정열로 탐구”를 하는 경향이 있다. 즉, 성적 리비도를 탐구욕으로 승화시켜 ‘사랑 대신 탐구’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다빈치가 속으로 동성을 좋아하나 겉으로 성행위는 하지 않는 ‘수동적 동성애’를 갖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독수리와 어머니

다빈치는 왜 동성애를 갖게 됐을까? 프로이트는 그것을 다빈치의 가정환경에서 찾는다. 다빈치는 서자로 태어나 어린 시절 어머니하고 살았다. 남편이 없는 어머니는 모든 애정을 자식에게 쏟는 법. 이 과도한 애정 때문에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는 강한 애착 관계가 생기게 된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이는 다른 여인들을 피해 다니게 된다. 그들이 자신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배반자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다빈치가 왜 여성에게 냉담했는지 설명이 된다.

어머니만 바라본 수동적 동성애자

두 성녀와 아기예수 습작

다빈치의 유년기 기억에는 바로 이런 경험이 투영되어 있다. 당시에 떠돌던 문헌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독수리는 오로지 암컷만 있어 수컷 없이 바람으로 수태하여 공중에서 출산을 한다고 믿었다. 이집트에서는 이렇게 독수리를 모성의 신으로 숭배했는데, 교부시대 이래로 교회에서도 마리아의 처녀수태를 설명하는 데 종종 이 전설을 이용했다고 한다. 다빈치는 이런 얘기를 듣고 자신을 “어머니는 있으나 아버지는 없는 독수리의 자식”으로 표상하게 됐다는 것이다.

독수리가 어머니라면 독수리 꽁지가 어떻게 남근이 될 수 있는가? 독수리 머리를 가진 모성의 신 ‘무트’는 젖가슴을 가진 여성으로 묘사되나, 동시에 발기된 상태의 남근을 갖고 있다. 여성의 몸에 달린 남근은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어린 시절 남자 아이들은 어머니의 몸에도 당연히 자기 것과 똑같은 생식기가 달려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자웅동체 ‘무트’에는 어린 시절 최초의 숭배 대상이던 어머니의 몸이 투영되어 있다는 얘기가 된다.

“어린 시절 나의 애정 어린 호기심은 어머니를 향해 있었고, 그때 나는 어머니에게도 나의 것과 똑같은 생식기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프로이트는 다빈치의 공상에 이런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푼다. 실제로 그가 분석한 동성애자들은 모두 “유아기 때에 일반적으로 어머니인 한 여성과 매우 강한 에로틱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회는 어머니와 아들의 근친상간을 엄격히 금한다. 그리하여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아이는 결국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성녀와 예수

이어서 그는 다빈치의 그림을 읽기 시작한다. 그의 걸작 ‘두 성녀와 아기 예수’를 보자. 예수의 할머니인 수산나와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둘 다 젊은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어, 별로 나이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이것이 다빈치의 가정사와 관련 있다고 본다. 다빈치는 다섯 살경 친할아버지에게 양자로 입적되는데, 할아버지의 부인이었던 젊은 여인이 그에게 친어머니 못지않은 애정을 보였다고 한다. 다빈치에게는 결국 어머니가 둘이었던 셈이다.

‘두 성녀와 아기 예수’를 위한 습작을 보면 원래 다빈치는 마리아와 수산나를 거의 한 몸처럼 붙은 모습으로 묘사하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다빈치가 무의식 속에서 두 어머니를 하나로 표상하고 싶어했음을 의미한다. 두 어머니가 수산나와 마리아로 표상된 것은, 양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아내이니 사실상 할머니였기 때문이고, 할머니와 어머니의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실제로 그 할머니가 어머니와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젊은 여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스카 피스터라는 사람은 이 작품에서 아주 흥미로운 요소를 발견했다. 마리아가 걸친 푸른 옷의 형상이 독수리를 닮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마리아의 허리 뒤로 돌아가는 부분이 독수리의 머리, 무릎 아래로 내려가는 부분은 날개, 왼팔에 걸친 부분은 꽁지에 해당하는데 그 꽁지가 공교롭게도 아기 예수의 입술에 가서 닿아 있다. 즉, 다빈치가 이 그림 안에 자신의 유년기 환상을 담아놓았다는 것이다. 각주에 이를 인용한 것을 보니, 프로이트는 이 주장을 꽤 신빙성 있게 본 모양이다.

요한이 된 살라이노

어머니만 바라본 수동적 동성애자

모나리자

프로이트는 다빈치의 대표작 ‘모나리자’ 역시 다빈치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증거로 본다. 지오콘다 공작부인의 미소를 보고 다빈치는 어린 시절 엄마 품에서 봤던 바로 그 미소를 떠올린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바사리의 증언을 그 증거로 든다. 바사리에 따르면, 습작 시절에 점토로 조용히 미소 띤 여인의 상을 만들곤 했다. 그가 이렇게 미소에 집착한 것은 어머니에 대한 성애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같은 신비한 미소는 그의 다른 작품에도 여러 번 나타난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을 보자. 그 그림에서 신비한 미소를 띠고 있는 요한의 모델은 바로 다빈치가 사랑했던 살라이노였다. 미소년의 아름다움은 여성도 아니고 아직 완전히 남성도 아닌 모호함에서 온다. 이 모호함을 통해서 어머니라는 여성에 대한 성애는 슬며시 살라이노라는 동성의 소년에 대한 성애로 이동한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애매모호한 저 형상에서 당시 사람들도 금방 동성애 코드를 느꼈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반동종교개혁 시대에 이 그림은 ‘바쿠스’로 제목을 바꿔 달아야 했다. 기독교의 성인을 동성애자로 묘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후 수백 년 동안 저 요한은 ‘바쿠스’라는 이교의 신으로 지내야 했다. 하긴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던 요한은 어딘지 야성의 신인 바쿠스와 닮은 데가 없지는 않다.

동성애는 일탈이다?

어머니만 바라본 수동적 동성애자

세례 요한

프로이트의 분석은 매우 날카롭고 재치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다빈치의 그림에서 독수리 형상을 보는 피스터의 주장을 근거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오늘날의 미술사학자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가끔 우연한 유사성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정신분석학자들이 유사성에 집착하는 것을 비꼬아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파이프는 가끔 가다 그냥 파이프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동성애에 대한 프로이트의 견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노트북’의 각주에는 프로이트가 동성애자들의 주장을 ‘과학적으로’ 반박하는 대목이 나온다. “자신들을 ‘제3의 성’으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동성애자들의 주장은 종지부를 찍어야 하며, 선천적 동성애와 후천적 동성애 사이의 구분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동성애는 어린 시절에 애정을 어머니에게 고착시켜 놓고 대상 선택을 엉뚱하게 해서 발생하는 ‘성적 일탈’일 뿐이었다.

미셸 푸코라면 여기서 ‘권력’을 읽을 것이다. 중세에는 동성애자의 운명을 신학자들이 좌지우지했다. ‘레위기’에 이르기를 동성애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다. 근대에는 철학자들이 동성애자의 운명을 관장했다. 그들은 동성애를 인간성을 모독하는 도덕적 일탈로 규정했다. 그 뒤를 이어 이제 정신분석학자들이 동성애를 관리하러 나섰다. “동성애는 일종의 정신병이고, 정신분석을 통해서 치유되어야 한다.” 여기서 동성애에 대한 편견은 졸지에 ‘과학적’ 차원으로 올라선다.



주간동아 553호 (p88~90)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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