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4

2006.07.18

아등바등 조폭의 비루한 삶

  • 이명재 자유기고가

    입력2006-07-14 13: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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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등바등 조폭의 비루한 삶

    ‘비열한 거리’

    한국에서 가장 흔한 직업은 무엇일까. 조폭이 아닐까. 그게 정말인가? 최소한 영화 속에서는 그렇다-아니면 그럴 것 같다-는 얘기다.

    조폭도 직업의 하나로 볼 수 있다면 조폭만큼 우리 영화에 많이 등장하는 직업군이 또 있을까. 친구로, 남편으로, 아내로, 사위로, 형제로, 심지어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만학도로까지 조폭은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스크린에 출몰하고 있다. 영화에서만큼은 조폭은 희귀한 직업이나 소수파가 아니다. ‘신흥 명문가’쯤으로 격상되기도 한다(‘가문의 영광’, ‘가문의 위기’).

    한국 영화가 이렇게 조폭을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조폭이라는 직업이 갖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평범한 소시민들과는 다른 비정상성이 영화가 필요로 하는 극적 요소에 들어맞는다. 드라마 ‘모래시계’에 조폭의 멋진 삶이 등장한 이후 우리 영화에서 조폭이 선망의 직업으로 당당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세상을 째째하지 않고 화끈하게 사는 조폭의 직업적 매력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조폭의 폭력성은 관객들에게 두 가지 점에서 호소력을 갖는다. 액션으로서의 볼거리가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면, 주먹 하나로 기성 질서에 저항하거나 뒤엎는 전복적 성격은 심리적 만족감을 준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기성의 질서를 주먹 하나로 파괴하고 제압해버리는 모습에서 소시민들은 대리만족을 꿈꾼다. 그렇다면 조폭물은 말하자면 일종의 ‘팬터지 영화’가 되는 셈인가.

    모든 조폭물이 다 화려한 세계만을 그리지는 않는다. 조폭물이 넘쳐나면서 내용은 분화 다양화돼가고 있다. 비장감 넘치는 표정에 검은색 정장을 빼입은 멋진 모습으로 그려지는 영웅적 묘사와는 정반대의 남루한 일상도 있다.



    얼마 전 개봉한 ‘비열한 거리’의 주인공처럼 병든 어머니와 두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고단한 가장, 동네 비디오 가게 하나 겨우 지키면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파이란’의 불쌍한 조폭도 있다.

    조폭들의 힘겨운 삶에 대한 사실주의적 접근이랄 수 있는 이런 영화들에는 ‘넘버3’ ‘초록 물고기’도 포함되는데, 이들 영화에서 그려지는 조폭들은 초라한 ‘서민’의 모습이나 다름없다. 돈이 돈을 낳고, 변호사가 변호사를 낳으며, 강남 주민이 강남 주민을 낳는 동종교배 번식의 사회. 이 견고한 철옹성 같은 사회의 밑바닥에서 아등바등 살아보려고 애쓰는 수많은 서민들과 그리 다를 게 없는 비루한 삶일 뿐이다.

    계층 이동이 점점 어려운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비열한 거리’의 꿈은 또 하나의 코리안 드림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조폭영화야말로 ‘리얼리즘’을 구현한 영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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