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8

2006.03.28

삶과 죽음, 경계 없이 강물에 몸 담그다

시체 태운 재 흐르는 물로 씻으며 정화 의식 … 문명에 찌든 현대인 영혼 치료 위해 끊임없는 발길

  • 글·사진 / 권삼윤 문명비평가

    입력2006-03-22 18: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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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발견은 인도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 설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인도 땅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은 인도인에 의한, 인도인을 위한 것이어서 특별하다. 올해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은 인도를 주제로 삼았을 정도다. 인도 현장에서 그 변화의 의미를 천착해본다.<편집자>
    삶과 죽음, 경계 없이 강물에 몸 담그다

    ①② 동틀 무렵 강가의 강변. 많은 사람들이 강가로 나와 목욕을 하고, 빨래를 한다. 외국인들은 보트에서 이 모습을 바라본다.

    힌두교도들의 성지 바라나시. 역에서 빠져나오기 무섭게 사람의 무리에 휩싸인다. 그런 사람들 사이로 자동차와 릭샤(삼륜 택시), 오토바이, 우마차들이 달린다. 한마디로 혼돈이다. 인도는 어디나 사람들로 가득 찼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은 처음이다.

    바라나시 하면 강가(Ganga)이고, 강가엔 가트가 있다고 했으니 먼저 거미줄처럼 얽힌 좁은 골목을 헤집고 강가의 가트로 달려간다. 강가는 성스러운 갠지스강을, 가트는 계단식 목욕장을 각각 일컫는다.

    소·개·염소·고양이·까마귀 등 온갖 동물이 어슬렁거리는 골목은 마치 세상의 축소판 같고, 저녁때라 매캐한 연기까지 합세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골목을 향해 고개를 내민 집과 가게는 너무나 협소하다. “생존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이상은 사치다”는 것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이미 해는 져서 지평선엔 붉은 기운만 감도는데 강 위엔 보트가 떠다니고 한 소년이 가트에서 연을 날리고 있다.

    온갖 동물 어슬렁거리는 골목은 세상의 축소판



    호텔로 돌아오자 프런트를 지키는 청년이 일출 모습을 보지 않겠냐고 묻는다. 그리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자 “바라나시에 와서 일출을 보지 않고 떠난다면 후회할 텐데요”라고 해 그러겠노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6시. 같은 호텔에 묵는 이들과 함께 안내자를 따라 새벽 공기를 가르며 골목길을 뚫고 가트로 갔다. 길은 전날과는 딴판으로 깨끗하고 조용했다. 가트는 구경 나온 사람들, 빨래하는 사람들, 목욕하는 이들, 꽃 팔러 나온 소년, 손님을 유혹하려는 사공 등으로 이미 난장을 이루고 있었다.

    일행을 태운 보트는 강 상류로 오르면서 몇 개의 이름난 가트를 보여주었다. 강가에 접한 가트만 해도 수십 개는 될 것 같았다. 어느새 붉은빛이 강물을 물들였다. 가트도 붉은색을 띠어갔다. 그에 따라 내 마음도 붉게 타올랐다. 지금 인도의 아침은 뭄바이(옛 봄베이)도 뉴델리도 아닌, 이곳 바라나시에서 열리는 듯했다.

    삶과 죽음, 경계 없이 강물에 몸 담그다

    ③ 온갖 동물들이 어슬렁거리는 바라나시의 좁은 골목. 사람이 쓰레기를 버리면 이들은 차례로 그 속에서 먹을 것을 찾아 치워버린다. 이 같은 자연의 순환을 통해 환경을 정화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 경계 없이 강물에 몸 담그다
    전날 본 강물은 탁했는데 지금은 아주 맑다. 냄새도 나지 않는다. 밤새 정화된 듯하다. 젊은 사공은 강가의 정화능력은 뛰어나다고 한다. 물 위로 작은 꽃송이들이 떠다닌다. 배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꽃송이가 움직이는 것 같다. 인도인들이 탄 배에선 힌두어로 외쳐대는 노래가 들려온다. 알 수 없는 특이한 리듬에 실려. 마음속에 타오르는 격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가 자기의 내면을 어루만지는지 곧 낮은 소리로 바뀐다. 순간, 조용히 흐르는 물결과 어울려 일대는 신비스런 분위기에 젖는다. 종교문화는 체험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는가. 체험은 자기가 사는 환경에 따라 달라지고….

    이른 시간인데도 시신을 태우는지 하류의 가트에선 불꽃과 연기가 치솟는다. 그 가까이에는 장작이 높이 쌓여 있다. 사공은 그 모습을 찍지 말라고 했다. 걸리면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면서.

    그런데 신기한 것은 시체가 타고 그 재가 흘러내리는데도 인도인들은 그 물로 입을 헹구고 얼굴을 씻고 목욕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주민 대부분이 강가로 나와 정화의식을 치르는 듯하다. 정화가 성화를 위한 준비작업이라면, 강가는 성지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어설픈 위생 관념으로 ‘무장한’ 나로서는, 강가의 정화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불결하기 짝이 없는 그 물에 온몸을 담근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신의 자비로 그들을 용케 피해간다면 몰라도.

    강가의 물은 히말라야의 한 봉우리인 카일라스산의 눈에서 발원해 인도대륙 동부를 적시다 벵골만으로 흘러든다. 물의 원천은 비다. 비는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져 얼굴을 타고 땅으로 떨어진다. 그 물은 생명을 움트게 하고 자라게 한다. 생명은 물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 물은 저온에선 고체가 된다. 카일라스산을 덮고 있는 눈과 얼음 또한 빗물에서 생겼다. 그러므로 자연은 이 물을 매개로 순환한다. 삶이 죽음이 되고 죽음은 다시 삶으로 전화된다고 믿는 윤회사상은 물의 순환을 오랫동안 지켜본 벼농사 문화권의 동양인들에 의해 태어났던 것이다.

    강가는 그런 만큼 윤회를 경험하기에 좋은 곳이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신의 고향이라며 어머니와 같은 곳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신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먼 하늘나라에 계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곁에, 자기 마음속에, 또 만물 속에 살아 있으면서 자기를, 그리고 온갖 생명체를 보살펴준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신과 하나가 되고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강가의 물에 몸을 담그며 모든 죄를 씻고, 죽은 뒤엔 그 물가에서 자신의 시체를 태우고 남은 재는 강물에 흘러보내고자 이 강가로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면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해탈되는 최고의 축복을 받으므로. 강가가 인도인들에게 성지가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힌두교도라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남녀를 불문하고 이런 믿음으로 일생을 산다.

    인간은 적응의 명수인가 보다. 더럽고 소란스럽고 냄새나고 모기까지 못 살게 구는데도 조금도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말이다. 게다가 아침식사보다 먼저 짜이(인도식 차)를 찾게 된다. 이제 나도 인도인이 다 된 모양이다.

    행동과 생각의 자유 만끽 현대인의 성지

    아침을 먹고 다시 강가를 찾았다. 프랑스 젊은이 둘이 대나무로 뗏목을 만들고 있었다. 뗏목이 완성되면 닻을 올려 다섯 명이 갠지스강을 따라 콜카타(옛 캘커타)까지 갈 것이라고 했다. 그때가 언제쯤이냐고 묻자 “아무도 몰라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다섯 명도 프랑스가 아닌 이곳에서 만났다고 했다. 누군가가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가보면 어떨까” 하여 의기투합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보면 이들도 이미 인도인이 다 된 듯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이 원하는 바를 해내고자 하니 말이다.

    바라나시에 온 지 일주일이 됐다는 덴마크 아줌마는 이들을 보자 “바라나시에선 날마다 새로운 볼거리가 생긴다”고 들려주었다. 그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대나무로 만든 플루트를 파는 키 작은 아저씨는 제 흥에 겨워 음악을 선사하고, 저 멀리선 일본 여자 몇이 이미 바라나시 토박이가 된 것처럼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러고는 웃는 것이었다. 그 소리가 내게까지 들려왔다. 이런 물에 면역이 안 된 상태라 피부병에 걸려 고생할 텐데도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연신 그렇게 했다.

    바라나시는 일상의 틀에 박혀 꼼짝없이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모험을 감행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모양이다. 프랑스 젊은이나 일본 여자들은 강가를 성지로 삼는 힌두교도가 아닌데도 바라나시이기에 이러는 것을 보면. 한국에서 왔다는 한 젊은 배낭족의 말처럼 바라나시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지낼 수 있는 곳이다. 구속이 없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물가가 아주 싸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 돈 1만원이면 하루를 버틸 수 있는 곳이 바로 바라나시니까. 물가가 걱정이 된다면 어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에서인지 한국의 배낭족 가운데에는 한동안 눌러살다시피 하는 이도 꽤 있었다. 부산이 고향이라는 20대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곧 인도를 떠납니다.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지난 16일 동안 이곳에서만 보냈는데 막상 떠나려 하니 아쉽네요.” 무엇을 깨달았느냐고 묻자 “부모님의 보호 아래서 세상 모르고 살았던 지난 세월을 되새기며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았던 게 큰 수확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지금 계산적이고 도시적인 삶에, 현대문명에 찌든 사람들이 망가진 자신을 수선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바라나시를 찾아오고 있다. 1년에 150만명이 방문한다는 통계도 있다. 인도 최대 관광지의 하나가 된 것이다. 이곳에 온 이들은 행동과 생각의 자유를 만끽한다. 덕분에 죽음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바라나시는 인도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현대인 모두의 성지라 해도 괜찮지 않을까.

    이제야 알 것 같다. 바라나시의 혼돈(카오스)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코스모스(조화)에 이르기 위한 전 단계라는 것을.

    인터뷰|샤크티 마이라 씨

    “인도는 다양성과 종교가 삶인 익사이팅한 나라”


    삶과 죽음, 경계 없이 강물에 몸 담그다
    인도의 문화평론가이자 ‘환희를 향하여(Toward Ananda)’를 쓴 저술가이고 조각가인 샤크티 마이라 씨(사진)를 뉴델리의 칸 마켓에 있는 ‘카페 터틀’에서 만나 인도 음식을 먹으며 인도 문화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았다.

    -외국인으로서 인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인도 문화의 특징을 간단히 말한다면 무엇이라 할 수 있나.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은 다양성이다. 넓은 대륙인 데다 기후도 다양하고 역사도 길어 지역에 따라 인종과 언어, 종교적으로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억만장자가 있는가 하면 하루에 몇 루피(인도의 화폐단위)로 근근이 때우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나라가 인도다. 학력의 차이도 대단하다. 이런 극단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는 나라를 달리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는 지속성이다. 인도 땅에는 4000년 전의 인더스 문명으로부터 현대문명까지 모든 것이 축적돼 있다. 고대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등이 아직도 인도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까. 이를 본 외국인들은 인도를 보수적인 나라로 보기 쉽지만 인도인들은 전통을 늘 새롭게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세 번째 특징은 영성이다. 영적인 체험이야말로 풍요로운 인도 문화를 가능케 한 바탕이다. 인도에서는 종교가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성지를 찾고, 종교적 메시지를 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힌두교는 어떤 종교인가.

    “인도인들은 힌두신앙을 종교로 보지 않는다. 삶 그 자체라 생각한다. 신을 늘 가까이 두고 힘들 때나 기쁠 때나 찾곤 한다. 집집마다 가네시(코끼리 얼굴 모습의 행운과 재물의 신) 상을 모시고 있는 것은 보았을 것이다. 힌두교에는 수많은 신이 존재한다. 그건 포용성과도 통한다. 인도에 오면 누구나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인도는 경제적으로 커다란 변혁을 맞이하고 있는데, 인도 문화의 장래를 어떻게 보는가.

    “인도는 크게 변하고 있다. 그것도 세계화, 서구화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인도는 넓고 인구가 많아 전체가 변화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놀라겠지만, 인도는 앞으로 매우 익사이팅한 나라가 될 것이다. 젊은 세대가 매우 진취적이기 때문이다. 인도는 늘 새로운 기운을 퍼뜨려온 역사를 갖고 있다. 그게 지금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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