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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의 평생지기로 종교학자였던 C.S. 루이스의 ‘나니나 연대기’에서도 전쟁의 그림자는 피할 길이 없다. 부모들은 더 이상 안전한 보호자가 되지 못하고, 공습을 피해 시골로 도망가는 아이들의 길. 외딴 저택의 벽장 뒤 얼음 가득한 세상은 사악한 마녀와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전쟁의 광기 넘치는 현실과 판타지 세계 넘나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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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오필리아는 어느 날 밤 요정의 인도로 신비한 미로의 중심에 이른다. 그곳에는 반인반수의 기괴한 생명체 판이 기다리고 있다. 판은 오필리아가 지상에서는 다다를 수 없는 지하세계 공주의 환생이고, 세 개의 마법 열쇠를 손에 넣으면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날부터 오필리아는 밤이면 마법 열쇠를 얻기 위해, 무엇이든 진짜가 되는 마법의 분필을 가지고 위험한 판타지 세계를 통과하는 모험을 거듭한다.
민중의 고혈 짜는 군인과 곤충 잡아먹는 두꺼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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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이것이 기예르모 델 토로의 세상이다. 감독은 “스페인 내전과 요정 이야기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요정 이야기에는 괴물이 있고, 정치가 사이에는 전쟁이 있다”고 응수한다. 멕시코에서 태어나 ‘크로노스에서 시작해 할리우드와 모국을 오가며 ‘악마의 등뼈’ ‘블레이드 2’ ‘헬 보이’를 거치는 동안, 델 토로의 세상은 피의 샤워를 벌이는 뱀파이어들이 도시의 거리를 활보하고, 유령이 된 친구가 햄릿류의 복수를 당부하는 곳이 된다. 결국 판타지의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더욱 뜨겁게 껴안으려는 델 토로는 ‘판의 미로’에서도 어김없이 볼 수 있는 자는 보라고 주문한다. 즉, ‘판의 미로’ 마지막 대사에서 내레이터는 “오필리아가 지상에 남긴 흔적들은 어디를 봐야 하는지 아는 자들만 볼 수 있다”고 속삭인다.
델 토로 감독, “영화보다 동화나 일러스트에서 영감 얻어”
영화는 바로 이러한 세상에 대한 통찰을 상징하는 ‘눈’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오필리아를 쫓는 손에 눈이 달린 괴물이나 눈알이 맞추어져야 비로소 완성되는 조각상들은 모두 이 판타지를 그저 잔혹한 동화로 보지 않을 때만 몸을 드러내는, 세상을 지시하는 이정표와도 같다. 특히 감독은 영화를 제작할 때 영화보다는 동화나 일러스트 같은 회화적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오필리아의 뒤를 쫓는 괴물 ‘창백한 남자’와 그 주변의 벽화 이미지는 자신의 아이를 산 채로 잡아먹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를 그린 고야의 ‘새턴’과 매우 흡사하다. 그렇다면 그토록 시계 혹은 시간에 집착하며 죽는 순간까지 아들에게 자신이 죽는 시간을 가르쳐달라고 외치는 비달 대위가 누구인지, 무엇의 괴물인지 자명하다.
‘판의 미로’는 ‘해리 포터’보다 매혹적이고 ‘반지의 제왕’보다 음습하다. 비록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반도 안 되는 제작비를 썼고 스페인어로 만들었지만, 충분히 신과 악마와 요정과 군인이 손에 손을 잡고 윤무를 추는 원형적인 신화의 세상으로 안내한다. 아이들에게 마술학교가 주는 위안과 즐거움을 줄 수는 없겠지만, 혼자서 본다면 더욱 미로 속의 자신을 느끼게 하는 곳. 판의 깊은 미로에 당신을 초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