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전 청장과 장희곤 전 서장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유착설이 제기됐다. 한화사건과 관련해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장 전 서장.
6월29일 장희곤(44) 전 남대문경찰서장이 검찰에 구속 수감됐다. 그가 현장 수사팀의 철수를 지시(직권남용)했고 이후 사실상 수사를 하지 않았다(직무유기)는 것이 검찰의 판단이다. 이어 7월2일 1심 재판부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게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사건 전모는 아직 미궁에 빠져 있지만 ‘한화그룹 김 회장 보복폭행 및 외압의혹 사건’(이하 한화사건)은 두 주역에게 책임을 묻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분위기다.
한풀 꺾인 언론과 대중의 관심에 비해 경찰 내부 분위기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어 흥미롭다. 한마디로 장 전 서장의 구속을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사건의 한쪽에 ‘한화’라는 대재벌과 전직 경찰청장이 로비스트로 등장하는 데 비해, 그가 아무리 ‘경찰의 꽃’인 총경이자 관할서장이었다지만 대칭으로 삼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구도라는 것. 실제 ‘경치일(警恥日)’이라는 자조와 함께 ‘경찰청장 사퇴론’까지 대두됐던 한 달 전의 정황을 떠올리면, 장 전 서장이 ‘전관(前官)과 금권(金權)에 약한 경찰’이라는 불명예를 홀로 뒤집어쓴 꼴이 됐다.
경찰의 자체 감찰 결과가 발표된 5월25일 이후 경찰 내부의 반발은 거셌다. 실명이 공개되는 사이버경찰청 게시판에까지 거침없이 이택순 청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경찰의 자존심이 상했다는 게 분노가 폭발한 가장 큰 이유다.
밑바닥 민심을 자극한 이유는 또 있다. 지난날 ‘검경 수사권 갈등’을 벌일 정도로 ‘가상의 적’이자 ‘실질적 경쟁자’인 검찰에 경찰 내 ‘핵심 브레인’을 허망하게 넘겨준 꼴이 됐기 때문이다. 장 전 서장은 경찰의 수사권 독립을 기획해 추진해온 핵심 주역 가운데 하나다. ‘장희곤’이라는 인물이 어째서 이 같은 상황에 몰렸는지 복기해볼 필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5월25일 밤,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변역 인근의 한 맥줏집에 10여 명의 젊은 경찰이 모였다. 그날 오전 남대문경찰서 서장에서 직위해제된 장 전 서장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였다. 장 총경을 집에서 불러낸 이들 젊은 경찰은 경찰의 환부를 도려내지 못한 경찰 수뇌부를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최대 피해자인 장 총경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고 한다.
“이렇게 울분을 토한다고 무엇이 바뀌겠는가. 앞으로 더 큰일이 벌어지더라도 걱정하지 말게.”
그의 예견대로 검찰의 칼날은 정확하게 장 전 서장을 향했다.
‘장희곤’이란 이름이 경찰 밖으로 알려진 계기는 사실상 ‘한화사건’이 최초라고 할 만큼 그는 대중에게 낯선 인물이다. 수사부서가 아닌 주로 ‘정보’와 ‘기획’ 부서에서 일해왔기 때문. 그가 올해 초 남대문경찰서장으로 부임하기 직전 보직이 바로 ‘수사권 독립’이란 경찰의 과업을 총괄하는 ‘경찰청 수사구조개혁팀장’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경찰조직이 그에게 갖고 있는 기대감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경찰대 졸업식 광경. 1981년 1기생을 모집한 경찰대는 올해까지 23기, 모두 2640명의 경찰 초급 간부를 배출했다.
장 전 서장은 경찰대 2기 출신으로 기수에서 줄곧 선두권을 달려왔다. 총경 승진 역시 2002년으로 동기 중 가장 빨랐고, 선후배간 신망도 두터운 편이다. 경찰대 1기 선배들은 한결같이 “대학 시절 그의 모습은 매우 어른스럽고 진지했다”고 기억한다. 1980년 경북사대부고를 졸업한 그는 경북대에 진학했다가 1982년 4년 전액장학금을 지원하는 경찰대 2기 신입생으로 재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강압적인 경찰대의 교육시스템에 내심 적잖은 불만을 가졌던 듯싶다. 경찰대는 창립 초기부터 육군사관학교를 모방하면서 성장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강의실로 이동할 때는 집합해 단체로 걸어간 것은 물론, 엄격한 기숙사 생활이 이어졌다. 장 전 서장은 94년 경정 시절 경찰대 ‘학생지도실장’으로 부임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 또한 그의 출중한 능력을 입증하는 사례라는 게 동문들의 평가다. 당시 학생회장을 지낸 경찰대 11기 출신의 회상이다.
“경찰대 지도실장은 학생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데, 그 자리에 처음으로 경찰대 선배가 온다고 해서 학생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는 오자마자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소대 개념으로 구성돼 있던 기숙사를 학년별로 분리하는 개혁을 시도했다. 경찰대에 최초로 ‘자율’이라는 문화를 들여온 혁신가가 바로 장 총경이다.”
당시 경찰대는 ‘학년별 4인1실’이라는 기숙사 제도를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학년별 4개실을 한 내무반으로 묶는 독특한 구조로 돼 있었다. 이를 근거로 자연스럽게 선배들은 후배들의 ‘군기’를 잡으며 위계질서를 확립했고, 이는 곧장 경찰조직 내의 ‘권위주의’로 직결됐다. 경찰대 출신이 똘똘 뭉쳐 경찰 내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평가도 바로 퇴행적 기숙사 제도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하지만 94년 시작된 신임 지도실장의 내무반 개혁은 경찰대 동문사회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장희곤 실장은 특유의 치밀하고 흔들림 없는 추진력으로 이 제도를 유지해냈고, 이로 인해 경찰대의 폐쇄적인 문화를 어느 정도 완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때문에 그와 함께 생활한 11기에서부터 15기까지 직속 후배들이 장 총경을 바라보는 시각은 ‘스승’ 그 이상이다. 경찰대 13기 출신의 한 경찰청 간부는 “대학 시절 장 총경의 모습을 지켜보며 처음으로 이상적인 경찰상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경찰 안팎의 관심을 받게 된 계기는 2002년 1월 총경 승진과 동시에 신설된 개혁추진단 산하 발전전략팀장에 기용되고부터다. 경찰 사상 최초로 미래전략을 위해 신설된 이 부서는 이후 1년간 수사권 독립을 포함한 경찰조직 및 운영에 관한 개선안을 연구했다. 이 부서의 활약은 곧장 2002년 말 시작된 참여정부 정권인수위원회와 연결되며 쏠쏠한 성과를 거둔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2006년 3월 경찰대 1기 황운하 총경이 맡았던 수사구조개혁팀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 발전전략팀장이란 자리는 ‘한화사건’의 로비스트 구실을 한 최기문 전 경찰청장과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2003년 3월 최기문 당시 경찰청장의 국회 인사청문회 대책팀장으로 활약하게 된 것. 혹자는 이 사실을 근거로 경북사대부고 선후배 사이인 최 청장과 장 전 서장의 인연이 깊다고 해석하지만, 오히려 장 전 서장 옹호론자들은 “그가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기용된 것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실제로 경찰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장 전 서장의 스타일은 ‘지연’이나 ‘학연’을 배척하는 ‘실력 지상주의자’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이 같은 호평의 배경에는 경찰생활 20년간 보여준 그만의 탁월한 자기관리에 있다. 그의 철두철미함을 드러내는 일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2006년 3월 제2기 수사구조개혁팀장으로 발령났을 때의 일화다. 그는 관행적으로 자신에게 배달된 축하난을 일일이 돌려줬다고 한다. 이후 직원들이 배달된 난과 선물을 받지 않게 된 것은 물론이다.
일부 직원들은 그에게 “물이 너무 깨끗하면 고기가 살 수 없다”는 식으로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민간인과의 식사자리에서 언제나 자신이 밥값을 내는 철저함으로 직원들을 압박했다고 한다. 물론 이 같은 결벽증(?)은 그가 2003년 부패방지위원회(현 청렴위)에서 일한 영향으로 해석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그는 청렴위에서 일하기 전 일선 경찰서에서 근무할 때도 똑같은 자세로 일관했다는 게 함께 일한 경찰들의 증언이다.
“고지식한 실력주의자” 경찰 애정 여전
“너무나 고지식한 사람이죠. 일과 인간관계에서 완벽을 기했다고 평가받았는데, 세상에 그런 경찰이 검찰에 의해 구속될지는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경찰커뮤니티 폴네티앙 ‘ID: 모난돌’)
공직자 신분으로 구속된 인물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한국 정서를 감안하면 그에 대한 경찰의 애정은 참으로 이례적이다. 심지어 그의 추락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은 그가 파워게임의 ‘희생양’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번 한화사건에서 무엇보다 그의 발목을 잡아끈 대목은 한화그룹 고문인 최기문 전 경찰청장과 고교 동문으로 엮인 미묘한 관계다. 실제 장 전 서장은 수사중단 지시를 내리던 날, 최 전 청장에게서 내사 여부를 묻는 전화를 받은 사실이 있다고 경찰 간부 가운데 유일하게 고백한 바 있다. 법정에서 핵심 쟁점이 될 이 대목을 놓고 벌써부터 경찰 내부가 시끄럽다.
일각에서는 그가 구속 사유인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명확한 반론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근거로 “비겁하다”는 식의 비난을 하기도 한다. 뭔가 약점이 있으니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후배 그룹의 장 전 서장에 대한 믿음은 대체로 확고하다. 남대문서에서 함께 일한 이들은 “최 전 청장과 장 전 서장이 개인적으로 친한 관계인 것은 맞지만 서로 자존심이 세기 때문에 구차한 부탁을 하거나 받을 사람이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그가 체질적으로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과, 경찰의 자체 감사에서도 뚜렷한 비위 혐의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 그를 옹호하는 근거다.
장 전 서장은 평소 자신의 소망이 은퇴 후 초등학교 앞에 문방구점을 여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어린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문방구점에서 아이들을 매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던 것. 게다가 그는 이제 갓 대학생이 된 큰딸과 고등학생인 아들에게 수시로 문자를 보낼 만큼 가정적인 아빠였다.
2006년 1월 수사구조개혁팀장을 마치고 남대문경찰서로 부임하기 직전 이택순 경찰청장은 축사를 통해 그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내렸다고 한다. “일찍이 이렇게 위기관리에 뛰어난 경찰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결국 장 총경을 시험에 들게 한 사람은 이 청장 본인이 되고 만 셈이 됐다.
과연 장 전 서장은 스스로 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경찰 제복을 입을 수 있을까. 아니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비리경찰’이라는 오명을 쓰게 될까. 경찰과 경찰대의 자존심이 그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