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0일 오후 뉴욕 맨해튼의 가전판매장 ‘베스트바이’를 찾았다. 지하 1층에 자리한 텔레비전 판매코너는 한국의 여느 가전판매장과 마찬가지로 ‘날씬한’ LCD와 PDP 고화질 TV(이하 HDTV·High Definition Television)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HDTV 가격 하락과 함께 2009년 2월17일을 기점으로 모든 방송이 디지털방송으로 전환되는 것을 계기로 미국인들의 HDTV에 대한 관심은 한층 높아진 분위기다.
이 매장도 그 점을 잘 아는지 2년 후의 디지털방송 전환 사실을 홍보문구로 내걸고 HDTV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곳 매장에서 만난 말라 요스(50·여) 씨는 “이미 소니의 HDTV 두 대가 있지만, 한 대를 더 사려고 한다”면서 “남동생의 권유로 삼성 제품을 살 생각”이라며 한국에서 온 기자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디지털방송 수신이 가능한 HDTV와 초고속 인터넷망을 이용해 100% 디지털화된 텔레비전 서비스를 제공하는 IPTV(Internet Protocol Television)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고화질 텔레비전을 보유한 소비자일수록 고화질 TV 프로그램에 대한 선호도가 높으며, 이런 시청자 욕구를 아날로그 방송인 케이블TV보다는 IPTV가 훨씬 수월하게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HDTV를 보유한 가정의 수가 날로 증가하는 미국에서 IPTV의 성공 가능성은 그만큼 높다고 하겠다. 미국의 라이트먼(Leichtman) 리서치그룹에 따르면, 지난해 초 한 대 이상의 HDTV를 보유한 미국 가정이 1620만 가구였으나 같은 해 6월에는 1900만 가구로 17%나 상승했다. 라이트먼은 2010년에는 6500만 가구가 한 대 이상의 HDTV를 보유할 것으로 내다봤다(이는 미국 전체 가구의 절반 이상이 HDTV를 보유하는 것을 뜻한다).
이미 HDTV 경험을 한 요스 씨는 HDTV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화질이 뛰어나서”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IPTV’라는 용어나 미국의 양대 통신회사인 버라이즌(Verizon)과 AT·T가 2년 전부터 제공하는 IPTV 서비스를 모르고 있었다. “전 열혈 시청자가 아니기 때문에 화질 좋고 요금이 적당한 서비스면 만족해요.”
더 나은 화질과 합리적인 가격. 미국의 미래 IPTV 소비자들이 현재 머무는 지점은 여기까지다. 2년 전 IPTV 서비스가 시작됐고 인터넷과 텔레비전의 결합으로 무궁무진한 부가서비스가 가능하다지만, 대다수 시청자는 이러한 서비스에 대한 경험도 부족하고 잘 알지도 못한다. 각각 2005년 9월과 2006년 6월 IPTV 서비스를 시작한 버라이즌과 AT·T는 현재 50만 가구와 4만 가구를 IPTV 가입자로 확보하고 있다. IPTV가 텔레비전 서비스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잡았다고 보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는 수치다.
2010년 8.6% 점유율 예상
그러나 그 성장세는 케이블TV 사업자들이 위기감을 느낄 만한 속도다. 특히 버라이즌의 IPTV 서비스인 파이어스(FiOS) TV는 2005년 9월 텍사스를 시작으로 현재 11개 주에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는데, 2006년 20만명이던 가입자가 2007년 6월 현재 50만명으로 갑절 이상 늘었다. 뉴욕 버라이즌 본사에서 만난 숀 스트릭랜드 부사장은 “고객 이탈률이 방송시장 평균치보다 훨씬 낮을 뿐 아니라 지인의 권유에 의한 가입이 20%에 이른다”며 “소비자들이 대체로 파이어스 TV에 만족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 전문기관 가트너(Gartner)도 지난해 미국의 IPTV 서비스 가입자 규모가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연평균 110%씩 상승해 2010년 TV 시청 가구 중 8.6%의 점유율을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그렇다면 버라이즌과 AT·T 등 미국 통신회사들은 IPTV의 어떤 장점을 내세워 소비자들을 설득하고 있을까? 미국의 IPTV 가입자들은 한국의 방송 서비스와는 질적으로 차별되는 ‘TV 이상의 TV’를 즐기고 있을까?
워싱턴D.C.와 인접한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는 정부기관이나 정보기술(IT) 기업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주로 거주해 부촌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버라이즌은 지난해 12월 이곳 페어옥스(Fair Oaks) 몰에 자사 상품들을 체험할 수 있는 쇼케이스 숍(Showcase Shop) ‘버라이즌 익스피리언스(Verizon Experience)’를 마련했다. 소득수준이 높고 선진기술에 밝은 이 지역 주민을 상대로 IPTV 가입자를 적극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자리한 ‘버라이즌 익스피리언스’ 숍(오른쪽)에서는 IPTV 서비스인 ‘파이어스 TV’를 자유롭게 시청할 수 있다.
파이어스 TV는 현재 400개 채널, 8600개 VOD 타이틀, 1800여 편의 영화 VOD, 47개 음악채널, 그리고 24개 HD 채널을 공급하고 있다. 파이어스 TV보다 많은 채널을 공급하는 케이블TV로는 ‘에코스타’가 유일하다. 대부분의 케이블TV가 HD 채널에 대해 추가요금을 받지만, 파이어스 TV는 기본 패키지에 19개 HD 채널을 포함하고 있어 소비자 반응이 좋다고 한다.
파이어스 TV의 ‘TV 이상의 서비스’에 대해 스테닛 그룹매니저는 ‘파이어스 1’ 채널을 예로 들었다. 이 채널은 버라이즌이 직접 방송제작사가 돼 버지니아주 지역뉴스를 전한다. 뿐만 아니라 TV에 자기 집 우편번호만 입력하면 집 주변의 교통상황과 날씨 정보가 팝업창처럼 브라운관에 뜬다. 그는 “앞으로 자녀의 학교 축구경기도 ‘파이어스 1’ 채널을 통해 안방에서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유버스(U-verse)’라는 이름으로 IPTV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AT·T도 e메일 인터뷰에서 자사의 ‘TV 이상의 서비스’에 대해 강조했다. 유버스 역시 케이블TV보다 많은 수의 HD 채널을 기본 패키지에 포함해 제공하며, DVR(디지털 비디오 리코더)를 이용해 동시에 4개 프로그램을 녹화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녹화할 TV 프로그램을 지정할 수 있으며, 현재 시청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그대로 둔 채 채널 서핑을 할 수도 있다.
관련 기술과 서비스 진화 중
거실에서 파이어스 TV를 시청하고 있는 한인 가정.
하지만 아직까지 IPTV의 다양한 TV 이상의 서비스는 널리 활용되지 않는 듯하다. 7개월 전 파이어스의 패키지 상품에 가입한 페어팩스 거주 한인 이민자인 조병국(41) 씨는 “초등학생인 자녀들이 DVR를 이용해 프로그램 녹화 기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과 화질이 더 낫다는 점 외에는 케이블TV와의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조씨가 버라이즌을 선택한 것은 파이어스 인터넷의 속도가 케이블TV가 제공하는 인터넷 서비스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FTTH(Fiber to the Home·가정 내 광케이블, 광케이블을 가정까지 연결해 기존 ADSL보다 100배 이상 빠르고 안정된 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를 구축한 버라이즌은 최소 5Mbps에서 최대 50Mbps의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실 파이어스 인터넷은 파이어스 TV보다 인기가 높다. 2006년 말 68만7000명이던 파이어스 인터넷 가입자가 2007년 6월 현재 100만명으로 훌쩍 뛰었다. 이는 파이어스 TV 가입자(50만명)의 2배 수준이다.
조씨는 또 “IPTV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저렴한 패키지 안에 케이블TV가 제공하지 않는 HD 채널과 어린이 채널이 많아서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파이어스 TV가 소비자에게 케이블TV보다 업그레이드된 화질과 채널 구성, 저렴한 비용으로 인식되고 있는 셈이다.
당초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 기능은 통화 연결이 안 될 때를 대비한 보조 장치였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활발하고도 창의적인 활용으로 문자메시지는 음성통화만큼이나 중요한 서비스 영역으로 발전했다. IPTV도 마찬가지 아닐까. 인터넷과 TV의 결합이 가져다줄 새로운 세상은 아직 결정된 바 없다. 2년 전 IPTV 서비스가 처음 상용화된 미국도 현재는 소비자들이 IPTV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관련 기술과 서비스도 ‘완성’보다는 ‘진화’ 단계에 있다.
IPTV가 좀더 깊숙이 일상생활에 스며드는 단계에 이르면 IPTV는 어떻게 쓰일까. ‘음성통화’ 수단에 그쳤던 전화를 멀티미디어 기기로 변신시킨 휴대전화처럼 IPTV도 ‘바보상자’ 취급을 받는 텔레비전의 개념과 용도를 완전히 변화시킬 것인가. 미국의 IPTV 현장에서 목격한 것은 ‘TV 혁명’의 출발선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