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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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섭은 창의성을 죽인다

  • 이명희 공주대 교수 역사학·자유주의운동연합 운영위원장

    입력2007-07-16 11: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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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섭은 창의성을 죽인다
    요즘 내신성적 반영 비율을 둘러싼 대학, 교육부 간 갈등을 지켜보면서 교육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학의 자율성을 헌법에 보장하고 있는데, 대학의 운영과 관련한 입학 방법에 대해 교육부가 ‘3불정책’ 같은 획일적 지침을 마련해 관리하는 것이 타당한지 묻고 싶다. 심지어 내신성적 반영 비율도 구체적으로 50% 이상이라고 정해 간섭하는 것이 과연 정부 부처가 할 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교육부가 국가의 미래 인적자원에 대한 정책을 수립·추진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교육의 질을 관리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전문가들 사이에 이의가 없다. 그런데 중앙부처가 초·중·고 및 대학의 학교 운영이나 교육과정 편성 등까지 관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 즉 대학 운영은 자율에 맡기고 초·중·고의 학교 운영과 교육과정 편성 등에 대해선 시도 교육청으로 업무를 이관하는 동시에 일선 학교에 자율권을 주자는 안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당장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마땅히 추진돼야 할 과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왜 교육부는 대학이 자율적으로 결정해도 될 내신성적 반영 비율에 대해 정부 지침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일까? 그것도 대학교수 시절 대학의 자율을 강조하던 분이 교육 수장을 맡고 있는데, 왜 그렇게 대학의 자율을 불신하고 부정하는 것일까? 그 답은 교육부가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침에 충실히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교육부는 전문부서로서 대통령으로부터 자율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문제는 자율이다. 자율은 모든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각자의 선택과 결정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고 책임지려는 자세다. 그렇게 할 때 사회는 성숙하고 선진화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자율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기운으로 넘쳐나고 있다. 대통령부터 교육부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교육부도 산하 교육청과 대학에 대해 자율성을 거의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정치를 비롯한 다른 분야에서도 상대에게 관용을 베푸는 데 인색하다. 관용에 인색하다는 것은 상대방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학 자율과 책무는 선진화 밑거름



    민주주의는 자율과 책임이 뒷받침될 때 성숙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대학에 대해서조차 자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특히 스스로 민주세력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대학의 자율을 막고 자신의 가치를 강요한다. ‘교육의 기회균등’이라는 가치를 위해서는 상대방의 자유나 권리쯤은 무시해도 좋다는 생각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민주세력’이 자율과 책임의 질서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여러 나라는 자율과 책무의 개혁을 통해 선진화 경쟁을 하고 있다. 우리 대학사회도 자율과 책무 없이 선진화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이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지금 대학 입학제도를 둘러싼 3불정책이나 내신반영 비율 때문에 대학의 자율성이 기로에 서 있다. 교육부 장관은 대통령의 지엄한 명령 앞에 교육부의 자율성을 던져버리고 말았지만, 지금 대학들은 교육부의 행정적·재정적 압박과 명령 앞에 힘겨워하며 버티고 있다. 평교수들의 용감한 의견 표명이 교육부의 일보 후퇴를 가져왔다. 대학의 자율도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성장했던 것처럼, 자율도 용기와 결단을 요구한다. 대학이 자율과 책무의 질서를 확립해야 우리 사회 각 부문도 선진화할 수 있다. 대학의 자율성 확립이 선진화를 향한 중요한 걸음이 된다는 것을 명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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