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명물 이층버스에도 감시카메라가 장착돼 있다.
개인정보 보호 전문가 집단인 ‘감시사회네트워크’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의 핵심 내용이다. 10여 명의 전문가 집단이 공동 참여해 작성한 이 ‘감시사회 보고서’는 영국인들이 서유럽 어느 나라 국민과 비교해보더라도 가장 심각한 사생활 노출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존경받던 영국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기에 충분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10년간 카메라 설치에 90억 투입
영국에는 현재 전국적으로 약 420만 개의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쯤 되면 전 세계에서 작동 중인 감시카메라의 20%가 영국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이 보고서의 분석도 과장은 아닐 듯하다. 런던 도심의 대로변과 지하철역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감시카메라는 물론 한적한 소도시 공원이나 학교 주변 골목길, 심지어 대학 도서관 안에서도 영국인들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감시카메라의 눈길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영국 정부가 지난 10년 동안 이들 카메라 설치에 쏟아부은 돈만도 500만 파운드(약 9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감시카메라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는 반면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위한 입법은 이러한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다 보니, 사생활 침해 우려에 대해 영국 정부가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비난이 뒤따르고 있다.
‘감시사회 보고서’가 경고한 사생활 침해 사례가 비단 감시카메라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영국인이 수시로 드나드는 대형 슈퍼마켓의 재고관리와 제품 이력 추적을 위해 도입된 전자태그 시스템이나 영국 전역에 160개 정도 운영되고 있는 대형 유통업체의 우수 고객 회원제도 등도 개인정보가 외부에 유출될 가능성이 높은 위험 요인으로 지목됐다.
최근 런던에 새로 도입된 지하철-버스 연계용 ‘오이스터 카드(Oyster Card)’도 도마에 올랐다. 지하철역과 버스에 설치된 단말기마다 이 교통카드를 이용한 승하차 기록이 남기 때문에 경찰이나 시 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런던 시민들의 이동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평범한 영국 성인 한 명의 개인정보가 행정 편의를 내세운 이런저런 전산화 시스템을 통과하면서 무려 700개의 서로 다른 데이터베이스에 집적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국민보건의료서비스(NHS)를 통해 의료산업의 상당 부분을 국가관리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는 영국 보험체계의 특성상 개인의 건강 기록이 이 데이터베이스에 꾸준히 집적될 것이고, 여기에 개인 신용 기록이나 구직활동 기록 등까지 더해지면 개인의 사생활은 타인들의 시선 앞에 발가벗겨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또한 이 보고서에는 지금과 같은 사생활 감시체제가 계속 유지될 경우 10년 후인 2016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예측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에는 슈퍼마켓에 들어갈 때마다 소비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카메라를 통해 기록될 뿐 아니라, 대형 유통업체의 구매 기록을 통해 소비자가 어떤 음식을 자주 사먹는지와 같은 식생활 습관까지도 외부로 알려질 수 있다. 이럴 경우 심지어 자신만이 알고 있던 질병을 문제삼아 취업에서 불이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자못 심각한 시나리오마저 제시된다.
범죄 예방 내세워 기본권 침해 논란
이러다 보니 지식인 사이에서는 산업자본주의 시절 세계를 호령하던 영국이 정작 정보화라는 새로운 세계질서의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해가지 못하는 것 아니냐며 우려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각종 입법 조치와 정부 규제의 중요성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데도 영국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잣대를 그대로 지닌 채 범죄 예방이라는 목표만을 내세워 시민들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정보와 사생활 보호에 대한 정책 부재가 인권과 민주주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위신에 먹칠을 할지도 모른다는 이러한 우려는 최근 블레어 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반테러 정책에 가려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블레어 정부가 2010년부터 개개인의 인적 사항은 물론 생체정보까지 담은 신분증명서 제도를 도입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당 정부가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이 신분증명서에는 개인의 지문이나 홍채 색깔과 같은 생체정보가 수록된 전자칩이 부착될 예정이어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블레어 정부는 테러를 사전에 봉쇄하려면 생체형 정보 집적을 통한 테러 용의자들의 ‘사전관리’가 불가피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생체형 신분증명서 도입을 밀어붙이고 있다.
신분증명 제도에 대한 영국의 역사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까지만 해도 영국인들은 신분증명서를 지니고 다녔다. 또 이러한 신분증명 제도가 나치의 스파이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라는 데 많은 국민이 공감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52년 처칠 정부는 전쟁을 겪고 난 영국인들이 경찰의 신분증 제시 요구에 갖는 반감을 고려해 이 제도를 폐지한 뒤, 지금까지 영국인들은 운전면허증이나 여권 외에 별도의 신분증을 갖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따라서 정부의 구상이 관철된다면 영국인들은 반세기 만에 다시 신분증명서를 갖게 되는 셈이다. 블레어 총리가 최근 12월 중으로 이 제도의 시행에 따른 구체적 지침을 발표하겠다고 공언함으로써, 야당과 일부 시민사회가 반발하고 나섰음에도 생체형 신분증명 제도의 도입을 강행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물론 생체형 신분증명서 도입 여부는 단순히 개인정보 보호와 관련한 문제만은 아니다. 블레어 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 중인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와도 맞물려 있어 여야가 각각 총선 공약으로 ‘강행’과 ‘폐지’를 내세워 물러설 수 없는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가 세계 최고의 사생활 침해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영국은 이 제도 도입 여부를 놓고도 감시카메라를 둘러싼 논란보다 더욱 뜨거운 논쟁을 예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