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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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담은 그림은 근대 군사훈련 교재

전투력 강화 위해 연속동작 묘사해 사용 … 수백년 노하우 축적돼 마침내 영화 탄생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입력2006-11-27 09: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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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해리 포터’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마술학교 건물의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이 동영상처럼 움직이는 장면이었다. 액자 테두리 안에 갇힌 유화의 이미지가 움직이며 소리를 내는 것이 우리에게 놀라움을 주듯, 역사상 처음으로 이미지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도 사람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로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는 동영상을 보여주었을 때, 관객들은 눈앞으로 육박해오는 기차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고 하지 않던가.

    시간 담은 그림은 근대 군사훈련 교재

    보티첼리, 모세의 일생 1481~1482.

    모세의 일생

    독일의 비평가 레싱은 예술을 공간예술과 시간예술로 나누었다. 이 구분에 따르면 회화는 어디까지나 공간예술, 즉 정지된 시간 속에 갇힌 공간의 환영이다. 하지만 화가들도 때로는 정지된 순간의 모습이 아니라, 시간축을 따라 전개되는 사건을 묘사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 화가들은 이럴 때 하나의 화면에 두 개 이상의 장면을 그려 넣었다. 그러면 당연히 같은 인물이 한 화면에 여러 번 반복해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보티첼리의 ‘모세의 일생’이라는 작품을 보자(그림 1). 이 그림에는 하나의 공간에 주황색 옷을 입은 모세가 일곱 번이나 등장한다. 다른 그림이라면 아무 데서나 출발해 아무 데로 시선을 옮겨도 무방하겠지만, 이 작품에는 시간축이 들어 있어 마치 선형적인 텍스트처럼 일정한 방향으로 읽어야 한다. 여기서 독해의 시선은 화면 오른쪽 아래에서 시작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집트 왕궁에서 자란 모세는 어느 날 이집트인이 동족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격분해 그를 살해한다(1). 이 때문에 쫓기는 몸이 된 그는 파라오의 왕궁을 빠져나와 미디안 땅으로 도피한다(2). 어느 날 그곳의 한 우물가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제사장의 딸들이 물을 긷다 목동들에게 방해를 받는 장면을 목격한다. 목동들을 쫓아낸(3) 모세는 여인들을 도와 물을 길어 양들에게 먹이고(4), 이 인연으로 그들 중 하나와 결혼한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이집트 왕이 죽고 평범한 삶을 살던 모세에게 신적 사명이 내려진다. 어느 날 그는 양을 치다가 우연히 호렙산에 이른다. 그곳에서 불이 붙었으나 타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고 놀라고 있을 때 하늘에서 “이곳은 신성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는 음성이 들려온다. 신을 벗은(5) 모세는 야훼로부터 네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계시를 받고(6), 그 명령에 따라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광야로 나온다(7).

    예수 수난

    피렌체의 산마르코 수도원 벽은 초기 르네상스의 거장 프라 안젤리코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그 벽화들 중에는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를 내는 이상한 그림이 있다. 가운데에 눈을 가리고 앉아 있는 이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허공에 떠 있는 이상한 이미지들이다. 왼쪽으로는 목이 잘린 한 사내의 머리가 보이고, 그 반대편에는 막대기를 든 잘린 손목이 역시 허공에 둥둥 떠 있다. 무슨 그림일까?(그림 2)

    시간 담은 그림은 근대 군사훈련 교재

    프라 안젤리코, 예수를 조롱함 1440~1441.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군중에게 수난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왼쪽 사내는 예수에게 침을 뱉는다. “지나가는 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마태복음 27:39~40) 오른쪽의 손은 십자가 위의 예수에게 신 포도주를 건네고 있다.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마태복음 27:48)

    프라 안젤리코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벌어진 몇 가지 사건을 한 장의 그림에 압축해서 그려 넣은 것이다. 이런 식의 압축적인 표현은 되도록 잔혹한 장면의 묘사를 피하면서 동시에 그림에 내러티브 구조를 도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묘사는 사실 르네상스보다는 중세 말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림에 내러티브를 넣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인지 이런 묘사의 전통은 르네상스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1500년대 제작된 목판화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르스 그라프가 그린 예수의 부활 장면을 보자. 무덤에서 일어난 예수의 주위에 수많은 사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화면 왼쪽 꼭대기의 은전 30냥은 유다가 예수를 파는 장면, 십자가 양쪽에 걸린 채찍은 예수가 고문받는 장면, 침을 뱉는 사내의 머리는 예수가 군중에게 모욕당하는 장면, 왼쪽의 세 개 못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 그 옆의 닭은 베드로가 새벽이 오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장면이다(그림 3).

    오늘날 우리가 파일을 압축해 전송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압축파일을 푸는 중세인의 비결은 상상력. 그들의 상상력은 우리 것보다 왕성해서 ‘못’만 보고도 로마 병정이 예수의 손에 못을 박는 동영상을 풀 버전으로 떠올렸다. 중세인이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영상을, 오늘날 우리는 스크린 위에 고해상의 동영상으로 투사한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생각해보라.) 이를 우리는 ‘발전’이라 부르나, 이렇게 영화의 해상도가 높아질수록 오히려 관객의 상상력이 발휘하는 몫은 줄어드는 게 아닐까?

    시간 담은 그림은 근대 군사훈련 교재

    우르스 그라프, 예수의 부활 1506(좌).페터 드라흐, 피에타 1481(우).



    다음 작품은 이른바 ‘피에타’.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재미있게도 개별 사건들을 그림 둘레의 네모칸 속에 넣어 묘사하고 있다. 맨 아래 가운데를 보면 유다가 예수에게 키스를 한다. 그 옆칸의 못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 그 반대편 네모칸의 주사위는 죽은 예수의 옷을 놓고 로마 병정들이 제비를 뽑는 장면이다. 우리는 이렇듯 네모칸을 이용해 그림에 시간축을 도입한 이야기에 익숙하다. 최초의 만화는 이렇게 신성한 장르였다(그림 4).

    영혼의 단련과 육체의 훈련

    시간 담은 그림은 근대 군사훈련 교재

    요한 갈러, 총사의 자세들 1615(좌).작자 미상, 총사의 자세들 1644(우).

    중세인에게 시간을 담은 그림은 원래 영혼의 단련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면서 교회의 권력은 약화되고 대신 세속국가의 역할이 강해진다. 이른바 ‘근대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국가’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상비군이다. 중세의 교회가 백성들의 영혼을 단련시키려 했다면 근대의 국가는 국민의 신체를 훈련시키려 한다. 이 시기에 시간을 담은 그림은 주로 전투력을 강화하는 군사훈련의 교재 속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군대에서 제식훈련 다음으로 배우는 것이 총검술이다. 신체와 총검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병사들은 집총자세 16과 같은 연속동작을 반복적으로 연습하게 된다. 근대 군대에서는 이 육체의 훈련을 위한 교재가 필요했고, 여기에 연속동작을 묘사한 그림들이 사용되곤 했다. 다음은 17세기에 나온 그림으로, 오늘날의 소총수에 해당하는 ‘총사’(銃士)를 묘사한 것이다. 자세히 보면 총을 장전해 발사하기까지의 여러 동작을 단계별로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림 5).

    이보다 조금 더 뒤에 나온 그림 역시 마찬가지 목적을 가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이 그림에서 총사 동작은 앞의 것보다 더 연속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만약 이 그림들을 하나씩 오려 책처럼 묶은 후 손가락으로 빠르게 넘기면, 총사가 총을 들어 겨냥하고 발사한 뒤 총열을 닦고 다시 장전하는 모습이 동영상처럼 펼쳐질 것이다. 한마디로 그림이 생명을 얻게 되는 셈인데, 이렇게 생명을 얻어 살아 움직이는 그림을 우리는 ‘애니메이션’이라 부른다(그림 6).

    크로노포토그래피

    시간 담은 그림은 근대 군사훈련 교재

    머이브리지, 갤럽으로 달리는 말 1878.

    영국의 사진사 머이브리지는 1872년부터 말의 움직임의 연속촬영을 시도했다. 거기에는 재미있는 배경이 있다. 당시 승마 애호가들은 ‘갤럽 상태로 달릴 때 말의 네 다리가 동시에 땅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 논쟁에서 ‘네 다리가 땅에서 동시에 떨어질 때가 있다’고 주장하던 스탠퍼드라는 인물이 자기 말을 과학적으로 입증해달라고 머이브리지의 사진술에 의뢰를 했던 것이다.

    그 전에 어느 화가가 트랙 옆에 레일을 깔아 말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면서 말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관찰하려고 시도했지만, 물음에 답변을 주는 데는 실패했다. 머이브리지는 예리한 화가의 눈으로도 풀 수 없었던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했다. 트랙을 따라 50대의 카메라를 늘어놓고, 말이 달리면서 셔터와 연결된 줄들을 건드리면 자동으로 촬영되게 해놓은 것이다. 이로써 논쟁은 깨끗하게 결판이 났고, 시간을 담은 머이브리지의 사진은 의뢰인을 기쁘게 해주었다(그림 7).

    앞에서 본 총사의 연속화처럼 이 연속사진들도 하나씩 잘라 겹쳐놓고 손가락으로 넘기면 갤럽으로 달리는 말의 동작이 나타날 것이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머이브리지의 것은 인간이 직접 그린 게 아니라 기계가 찍어낸 것이라는 점. 영화의 탄생까지는 이제 딱 한 걸음이 남았다. 그림이 갑자기 달리기 시작한 게 아니다. 마침내 달릴 수 있을 때까지 그림은 수백 년 동안 차근차근 움직일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이것이 영화 이전의 영화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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