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가 배급을 거부했으나 1억 달러가 넘는 흥행 수입을 올린 ‘화씨 9/11’의 포스터.
그래도 아이즈너는 살아남았다. 주주들의 요구에 굴복해 회장직을 내놓고 CEO직만 유지하는 수모를 겪기는 했지만. 지난 5월에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낙선을 겨냥해 만든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화씨 9/11’의 배급을 거부해 사전검열이라는 구설에 휘말리기도 했다. ‘화씨 9/11’은 디즈니의 배급 거부를 시작으로 온갖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두 달 가까이나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더니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사상 처음으로 미국에서만 흥행수입 1억 달러를 넘어서는 대박을 터뜨렸다. 디즈니에 개인 돈 600만 달러를 주고 이 영화를 사들인 제작사 미라맥스의 공동회장 하비와 보브 웨인스타인 형제가 막대한 수익을 올렸음은 물론이다. 속이 쓰렸는지 월트디즈니는 웨인스타인 형제에게 ‘화씨 9/11’ 수익금을 개인적으로 가져가지 않는다는 데 합의하지 않을 경우, 달리 말해 수익금을 나누지 않으면 앞으로 미라맥스에 영화를 배급하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제작비도 못 건진 영화 수두룩
디즈니가 제작한 영화 '킹 아더'.
그나마 다행인 일은 억만장자인 필립 안슐츠가 제작비의 대부분을 투자하고 디즈니는 배급권과 마케팅 비용으로 5000만 달러 정도만 썼다는 점이다. 역시 1억1000만 달러를 들인 웨스턴 뮤지컬 애니메이션 ‘홈 온 더 레인지(Home on the Range•4월2일 개봉)’는 4840만 달러로 반타작도 못했다. 1836년에 있었던 전설적인 텍사스 알라모전투를 소재로 한 제작비 1억 달러의 초대형 액션 서사극 ‘알라모’(4월9일 개봉)는 ‘80일간의 세계일주’와 맞먹는 올해 최악의 박스오피스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다. 북미 박스오피스는 2500만 달러였다. 장거리 경주의 전설 프랭크 T. 홉킨스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액션 어드벤처 ‘히달고’(3월5일 개봉)는 역시 1억 달러에 육박하는 제작비를 들여 6500만 달러의 박스오피스를 벌어들이는 데 그쳤다. 한마디로 1억 달러 넘게 제작비를 들인 영화가 내거는 것마다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알라모'.
쿡 스튜디오 회장 자리 보전 ‘불투명’
디즈니가 이런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올해의 야심작으로 기대를 걸고 있는 영화가 현재 세 편 정도 있다. 하나는 7월30일 개봉한 ‘빌리지’이고, 또 하나는 11월 개봉 예정인 ‘인크레더블(Incredible)’, 그리고 12월 개봉을 앞두고 있는 ‘물속의 삶(The Life Aquatic)’ 이다. ‘빌리지’는 영화 ‘식스 센스’로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며 서스펜스 스릴러물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작품이다. ‘인크레더블’은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의 북미 흥행기록을 세운 ‘니모를 찾아서’를 만든 픽사의 신작 애니메이션이다. ‘물속의 삶’은 ‘로얄 테넌바움’을 만든 웨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으로 빌 머레이와 오웬 윌슨이 바다를 항해하는 부자관계로 나온다. 디즈니가 이들 영화를 통해 기사회생할 수 있을지는 때가 돼서 뚜껑을 열어봐야 알 일이다.
'80일간의 세계일주'.
주주들의 요구로 회장직에서 물러난 디즈니의 CEO 마이클 아이즈너.
쿡 디즈니 스튜디오 회장은 인터뷰 때마다 “지난 4, 5월 뉴욕 양키스의 스타 데릭 지터가 32타수 무안타를 기록한 것 때문에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에서 커버스토리로 다뤄진 직후 안타 행진을 다시 시작한 것처럼 나도 곧 슬럼프를 극복하고 이기는 게임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영화업계 종사자들의 얘기는 다르다. 만드는 영화마다 실패하다 자신이 기획한 ‘앵커맨’의 히트를 앞두고 드림웍스에서 쫓겨난 뉴라인 시네마의 마이클 드 루카 프로덕션 책임자와 ‘스파이더 맨’으로 우뚝 서기 전까지 여자애들이나 보는 영화를 만든다며 조롱을 받아온 컬럼비아 픽처스의 에이미 파스칼 사장은, 과연 쿡 회장이 홈런을 칠 때까지 디즈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에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