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하며 차를 마시곤 했던 다산초당.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어귀에 이르자 차의 그윽한 향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바로 옆 전통찻집에서 차를 덖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인들은 차의 그윽한 향과 맛을 일컬어 차의 신, 즉 다신(茶神)이라고 한다. 그래서 차를 품다(品茶)하면서 ‘다신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이다. 나그네는 뜻밖의 다신을 만난 셈이다. 정약용의 영혼인 양 차의 혼백과 마주치다니 황홀하다. 정약용의 호가 다산(茶山)이 된 것은 지금 나그네가 서 있는 산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정약용이 40살에 강진으로 유배 온 까닭은 스무 살 때 이복 맏형 약현(若鉉)의 처남 이벽(李壁)에게서 천주교에 대한 얘기를 듣고 천주교 서적을 본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정조 15년 자신의 나이 30살 때 노론의 주도로 천주교가 사교(邪敎)라 하여 박해가 시작되자 동복 형 약전과 함께 배교한다. 이후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온 정약용은 노론의 공격에도 벼슬을 거듭하다 정조가 승하한 후 40살이 되던 순조 1년에 체포돼 국문을 받는다. 이때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형 약종과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 등은 사형당하고, 형 약전은 신지도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가야 하는 유배형을 받는다. 그러나 그해 10월 잠적해 있던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다시 국문을 받고 형은 흑산도로, 그는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정약용 영정.
정약용은 동문 밖 밥집 노파의 호의로 골방 하나를 얻어 기거한다. 처음 2, 3년 동안은 국문받은 몸의 후유증과 고향 생각에 빠져 술로 세월을 보낸다. 친인척과 선후배를 한꺼번에 잃은 비극과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절망감으로 괴로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밥집 노파의 한마디에 정신을 차린다. 노파가 어느 날 정약용에게 던진 말의 요지는 ‘부모의 은혜는 같은데 왜 아버지만 소중히 여기고 어머니는 그렇지 아니한가?’였다. 생의 뿌리를 묻는 노파의 말에 세상을 기피하려던 정약용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지극히 정밀하고 미묘한 뜻이 밥을 팔면서 세상을 살아온 밥집 주인 노파에 의해서 겉으로 드러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하면서 크게 깨닫고는 흐트러져 있는 자신을 경계한다.
정약용이 재기하는 또 하나의 사건은 혜장(惠藏)과의 우연한 만남이다. 백련사 주지 혜장과 밤새도록 마음을 주고받는 다담(茶談)을 나누며 차츰 다인이 되었고, 반면에 유서(儒書)에 밝았던 혜장은 정약용을 만나 그가 애독하던 논어와 주역의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갔던 것이다.
직접 판 약천 등 ‘다산초당’ 경치 옛날 그대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정약용에게는 한 잔의 차야말로 정신을 추스르는 영약(靈藥)이었고, 훗날에는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권의 서책을 마무리 짓게 한 저술삼매의 감로수였던 셈이다. 차를 좋아하게 된 정약용은 혜장에게 ‘병을 낫게 해주기만 바랄 뿐 쌓아두고 먹을 욕심은 없다오’라는, 차를 보내달라고 조르는 걸명(乞茗)의 시를 보내기도 한다.
추사 김정희의 친필로 쓰여진,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뜻이 담긴 보정산방 현판.
다산초당은 이제 기와로 덮여 있다. 그러나 정약용이 직접 판 샘 약천(藥泉)과 차 부뚜막인 다조, 초당 왼편 위에 직접 정석(丁石)이라고 새긴 바위, 제자들과 함께 만든 연지(蓮池) 등 초당의 네 가지 경치는 옛날 그대로다. 약천 물로 목을 축이고 나서 정약용이 흑산도에 있는 형 약전을 그리워하며 앉곤 했던 자리, 강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일각(天一閣)으로 가 정약용의 귤림(橘林)이란 다시(茶詩)를 읊조려본다. ‘책뿐인 다산초정/ 봄꽃 피어나고 물이 흐른다네/ 비 갠 귤나무 숲의 아름다움이여/ 나는 바위샘물 길어 차병을 씻네.’ 다산은 제자에게 말했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라. 기록하기를 좋아하라.’ 그러나 나그네는 다산이 자기 질서를 지키고자 날마다 다짐했던 맹세의 말이라는 것을 안다. 다산이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가 된 것은 바로 자신과의 약속을 몸부림치며 지켜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