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하먀 차를 마시곤 해던 다산초당.
이때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형 약종과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 등은 사형당하고, 형 약전은 신지도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가야 하는 유배형을 받는다. 그러나 그해 10월 잠적해 있던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다시 국문을 받고 형은 흑산도로, 그는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정약용은 동문 밖 밥집 노파의 호의로 골방 하나를 얻어 기거한다. 처음 2, 3년 동안은 국문받은 몸의 후유증과 고향 생각에 빠져 술로 세월을 보낸다. 친인척과 선후배를 한꺼번에 잃은 비극과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절망감으로 괴로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밥집 노파의 한마디에 정신을 차린다. 노파가 어느 날 정약용에게 던진 말의 요지는 ‘부모의 은혜는 같은데 왜 아버지만 소중히 여기고 어머니는 그렇지 아니한가?’였다.
정약용 영정.
직접 판 약천 등 ‘다산초당’ 경치 옛날 그대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정약용에게는 한 잔의 차야말로 정신을 추스르는 영약(靈藥)이었고, 훗날에는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권의 서책을 마무리 짓게 한 저술삼매의 감로수였던 셈이다. 차를 좋아하게 된 정약용은 혜장에게 ‘병을 낫게 해주기만 바랄 뿐 쌓아두고 먹을 욕심은 없다오’라는, 차를 보내달라고 조르는 걸명(乞茗)의 시를 보내기도 한다.
다산초당은 이제 기와로 덮여 있다. 그러나 정약용이 직접 판 샘 약천(藥泉)과 차 부뚜막인 다조, 초당 왼편 위에 직접 정석(丁石)이라고 새긴 바위, 제자들과 함께 만든 연지(蓮池) 등 초당의 네 가지 경치는 옛날 그대로다. 약천 물로 목을 축이고 나서 정약용이 흑산도에 있는 형 약전을 그리워하며 앉곤 했던 자리, 강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일각(天一閣)으로 가 정약용의 귤림(橘林)이란 다시(茶詩)를 읊조려본다. ‘책뿐인 다산초정/ 봄꽃 피어나고 물이 흐른다네/ 비 갠 귤나무 숲의 아름다움이여/ 나는 바위샘물 길어 차병을 씻네.’
추사 김정희의 친필로 쓰여진,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뜻이 담긴 보정산방 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