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2003년 11월19일 서울 적선동 현대상선 사옥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3월30일 현대엘리베이터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 끝에 신임 이사로 선임됨으로써 8개월간의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을 승리로 이끈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은 다음날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밝혔다. 3월23일 현대상선 주총에서부터 이어진 고된 강행군에 몸이 많이 아팠다는 그는 이날 눈에 띄게 수척한 모습이었다.
요즘의 현회장은 의욕적인 모습이라고 한다. 남편인 고 정몽헌(MH)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1주기를 맞아 남편에게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방어했을 뿐 아니라 그룹을 안정 궤도에 어느 정도 올려놓았다고 ‘보고’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집안 살림만 하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 앞에서 슬퍼할 틈도 없이 그룹 경영권 방어하랴, 계열사들의 경영을 개선하랴 눈코 뜰새 없이 바빴던 그였다.
전문경영인 내세우고 조용한 지원 ‘위임형’
계열사들의 경영은 호전되고 있다. 그룹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는 올 1·4분기에 1137억원 매출액에 분기순이익 605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전체의 당기순익 283억원을 2배 넘게 초과한 실적이다. 또 현대상선은 올 1·4분기에 1조1910억원의 매출액을 올렸다. 분기순익은 1022억원으로, 지난해의 적자(209억원)에서 벗어났다. 현대택배 역시 같은 기간 1082억원의 매출액에 17억원의 순익을 올려 순항하고 있다.
현회장의 한 측근은 “증권도 부실을 완전히 털어냈다. 다만 아산이 과거보다 좋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증권은 올 3월 말에 끝난 지난 회계연도에 부실을 털고 현투증권 부실 책임분담금 2051억원을 납부하면서 1982억원의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지만 오히려 새 출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증권 시황이 워낙 좋지 않아 현대증권 임직원들이 느끼는 부담은 크다. 현대증권 노조 관계자는 “정부가 은행의 업무 영역은 확대해준 반면, 증권사는 손발을 묶어놓은 상황이어서 증권산업 전체가 어렵다. 여기에 증권사 난립으로 증권사들의 가장 큰 수입원 가운데 하나인 거래 수수료를 덤핑하는 증권사들이 있어 증권사 임직원들은 생존권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현회장은 이처럼 2003년 10월 현대 회장에 취임한 이후 현대그룹에 ‘소프트 랜딩’하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가정주부가 비록 지금은 미니그룹으로 전락했지만 과거의 영화를 잊지 못하는 현대그룹을 제대로 이끌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업가 집안에서 자란 덕택인지 MH의 공백을 잘 극복하고 지금은 그룹의 중심으로 확고한 위상을 확보했다.
잘 알려진 대로 현회장의 친정과 외가 또한 시댁 못지않은 명문 집안이다. 조부 현준호씨는 호남은행 설립자다. 해운업체를 운영했던 부친 현영원씨(현대상선 명예회장)는 현대그룹과 사돈이 된 후 자신이 운영하던 신한해운을 현대상선에 흡수시켰다. 현회장의 외조부 김용주씨는 전방그룹 창업주이며, 모친 김문희 여사는 용문중·고교를 거느린 용문학원 이사장이다. 전방 회장인 김창성 한국경영자총협회장,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이 현회장의 외삼촌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현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위임형’이다. 구체적인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긴 채 자신은 대주주로서 뒤에서 이들을 조용히 돕고 있다. 특히 현대상선 노정익 사장에 대한 신임은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상선 안팎에선 “정상영 금강고려화학(KCC) 명예회장 측과의 경영권 분쟁 당시 경영권을 방어하는 데 앞장서준 것을 봤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해석한다.
현회장은 현재 현대아산 이사와 현대상선 이사회 의장, 그룹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그는 MH보다 더 확고한 그룹 지배력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MH는 현대아산과 현대상선 이사만을 맡았다. 7월12일 현재 현대엘리베이터의 최대 주주는 19.4%의 지분을 보유한 현회장 어머니 김문희씨. 이어 현대증권과 현회장이 각각 4.99%와 3.92%를 보유하고 있고, 12.47%의 자사주가 있다. 이를 포함해 현회장의 우호 지분은 모두 43.32%여서 현회장의 경영권이 도전받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2003년 11월25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위원회에서 금감위 윤용로 감독정책2국장이 현대투신증권 매각과 관련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경영권 분쟁 상대였던 정상영 회장과 화해 안 이뤄져
다만 시삼촌과 조카며느리의 감정은 아직 해소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의 화해 여부로 관심을 모았던 올 4월5일의 한식날은 정상영 명예회장이 고 정주영 명예회장 제사에 참석하지 않아 두 사람이 대면할 기회도 없었다. 이날 현대가(家) 일원은 경기 하남시 선영을 찾아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제사를 지냈다. 현대 관계자들은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두 분이 화해할 기회가 오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회장으로서는 KCC 측과의 경영권 분쟁에 앞서 현대증권 매각 문제가 첫 번째 위기였다. 정부는 현대투신증권 매각을 추진하면서 이 회사에 투입되는 공적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회사 대주주인 현대증권을 매각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대주주로서의 책임을 묻기 위한 차원이었다.
그러나 현대증권의 매각은 현회장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현대증권이 매각돼 계열 분리되면 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현대증권으로 이어지는 순환 출자구조의 일각이 무너져 그룹 경영권 방어에 구멍이 뚫리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증권은 매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텨 부실 책임분담금 2051억원을 정부에 납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과정에서 MH가 2003년 5월13일 현대증권 사장으로 영입한 김지완 사장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지완 사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2년 선배로 MH가 그를 영입할 때부터 참여정부와의 교류 창구 일을 맡긴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됐다. 현대증권 임직원들도 굳이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한 임원은 “김사장의 노력이 돋보였다”고 말한다.
현대그룹 임직원들은 미니그룹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현대의 ‘정신적’ 중심으로 자부한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MH에게 그룹을 승계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현회장이 현대건설 인수에 미련을 갖는 이유도 이런 저간의 사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현회장은 평소 “건설이 오늘의 현대그룹을 일군 모체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찾아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는 것. 그러나 그룹 임원들은 가까운 시일 안에는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