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더 레인’
그러나 지금 유엔은 여러 가지 문제로 비판받고 있다. 유엔 사무처 직원들의 뇌물 스캔들로 드러났듯 부패 문제에다, 평화유지기구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한계 등 유엔의 존재 의의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코피 아난 전 총장이 시동을 걸었던 유엔 개혁 작업은 이 같은 상황에서 나온 자구 노력이었다.
몇몇 영화들에서 등장하는 유엔도 호의적인 시선을 받고 있지 못하다. 영화 ‘비포 더 레인’은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공화국으로 독립한 마케도니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마케도니아 출신 감독이 만들었다. 기독교와 회교 사이의 뿌리 깊은 종교적·민족적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이곳에 유엔평화유지군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정작 살상 현장에는 유엔군이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인 사진작가 알렉산더는 이 아수라장을 보면서 사촌에게 “유엔은 어딨나?”라고 묻는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에는 유엔에 대한 냉소가 잔뜩 묻어 있다.
“다음 주에 오겠지. 시체 묻으러. 전쟁을 즐기고 사진을 찍으러.” 유엔의 무력함을 꼬집는 대목이다.
‘호텔 르완다’에서 유엔은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을 하는 이들로 그려진다. 무대는 벨기에가 식민지로 점령한 아프리카 르완다의 한 호텔. 벨기에가 세운 이 호텔의 사장은 백인이고 종업원들은 현지인인데, 유엔평화유지군도 이 호텔에 들어와 있다. 호텔은 극빈국인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외국 술과 담배, 음식이 넘쳐나는 곳이다. 그런 호텔 안에서 유엔평화유지군은 외신기자들 앞에서 ‘평화’를 역설한다. 학살과 기아의 참상이 벌어지고 있는 호텔 바깥의 현실과는 딴판인 태평스런 얘기를 늘어놓는 것이다. ‘유엔은 분쟁 현장의 귀족’이라는 비판이 왜 나오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러니 유엔이 테러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테러의 목표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피스메이커’에서 핵 배낭을 짊어진 테러리스트 듀란이 자살 공격 목표로 삼은 곳은 미국 뉴욕의 유엔 본부. 구유고 연방 출신인 듀란이 유엔 본부에 돌진하려는 이유는 인종청소와 학살이 자행되는 세르비아 사태에 대해 유엔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유엔을 응징하려 했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지적되고 있는 유엔의 여러 문제와 한계는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다. 그만큼 유엔의 개혁은 시급한 당면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