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열차에서 내려다본 몽트뢰와 레만 호수 전경.
지난밤 로마에서 시작된 열차여행은 같은 칸에 탄 이탈리아 여행자들과의 긴 대화 탓에 어느 때보다 짙은 피로감을 주었다. 그래서일까? 이른 아침 몽트뢰 역에 내려 들이마신 첫 숨은 상쾌하다 못해 해방감마저 느끼게 했다.
스위스 서쪽 레만 호숫가에 자리한 몽트뢰는 작지만 여유로운 휴양도시. 여느 유럽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오랜 유적이나 웅장한 건축물은 없지만, 하늘과 호수의 푸른 빛깔 사이로 알프스 산봉우리들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져 있어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다. 호반의 도시답게 기차역사 사이로 레만 호수가 내려다보인다. 마음 같아서는 호숫가의 시옹성으로 달려가 악명 높은 감옥과 단두대를 확인해보고 싶다. 그러나 타야 할 기차 시간을 생각하며 이내 포기한다. 오늘은 몽트뢰를 출발해 츠바이지멘(Zweisimmen)까지 2시간가량 골든패스라인 클래식 열차로 이동할 계획이다.
스위스를 관광대국으로 만든 일등공신은 알프스라는 천혜의 관광자원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철도다. 알프스 구석구석까지 여행자를 실어 나르는 철도 시스템은 수많은 관광객들을 스위스로 불러들이는 효자다. 산등성이를 굽이굽이 헤치고 톱니바퀴를 맞물리며 고봉(高峯)의 정상까지 여객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스위스 철도는 여행자로 하여금 눈 덮인 영봉(靈峯)과 드넓은 초원, 그리고 살레(스위스 전통 통나무집)가 만드는 목가적 풍경을 편리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스위스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열차 관광코스로는 베르니나 익스프레스, 빙하특급, 빌헬름 텔 익스프레스 그리고 오늘 내가 선택한 골든패스라인 등이 있다.
스위스 서부에 자리한 몽트뢰는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휴양지로 인기 높다(좌).<br>골든패스라인 클래식 열차의 외관(우).
1등칸 내부(좌).<br>클래식 열차 창 밖으로 펼쳐지는 알프스의 목가적인 풍경(우).
골든패스라인은 루체른에서 제네바까지 스위스를 동서로 이어주는 철도 구간이다. 많은 여행객들이 이 골든패스라인을 이용해 루체른, 인터라켄, 로잔 그리고 제네바 등을 여행한다. 그중에서 이곳 몽트뢰와 츠바이지멘 구간은 세계적 호화열차인 오리엔탈 특급열차를 연상케 하는 실내장식을 자랑하는 클래식 열차와 천장까지 유리로 된 파노라믹 열차가 운행되고 있어 여행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몽트뢰에서 브록까지는 치즈와 초콜릿 공장 방문 일정이 포함된 초콜릿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이른 아침, 몽트뢰 역에 모인 여행자들은 클래식 열차여행에 대한 기대에 부푼 채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클래식 열차의 인기가 높다고 하여 나는 로마에서 좌석을 예약하고 왔다. 그러나 내가 탄 객차에는 모두 5명의 여행자밖에 없었다. 성수기가 아닌 데다 이른 아침의 첫차인 탓인가 보다. 그러나 허탈한 기분도 잠시, 화려한 실내 장식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의자, 탁자 그리고 천장까지 모두 짙은 오크색 목재로 고급스럽게 장식돼 있다. 나는 유레일패스를 소지한 덕에 고작 7스위스프랑(약 5500원)의 예약비만 지불했다. 싼값에 호화로운 열차를 호젓하게 이용할 수 있었기에 즐거움은 더욱 컸다.
오전 8시45분에 출발한 열차는 레만 호수를 내려다보며 산등성이를 오르기 시작한다. 고풍스런 열차의 창 너머로 스위스의 목가적 풍경이 펼쳐진다. 제법 높은 산들의 중턱에 자리잡은 너른 풀밭, 그 위에서 자유롭게 햇살을 즐기며 풀을 뜯어먹는 소와 양떼, 곳곳에 자리잡은 살레…. 금방이라도 양치기 소년이 뛰어나올 것 같다.
열차는 몇 개의 작은 역에서 멈추고 출발하기를 반복한다. 그중 몽트뢰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샤토되(Cha^teau d’Oex) 역과 루주몽(Rougemont) 역 구간은 각종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 창문 너머로 하늘 높은 곳에서 나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패러글라이더들과 하이킹을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열차가 샤토되 역에 도착하자 중년의 프랑스인 부부가 등산화 끈을 고쳐 매고는 등산 지팡이를 흔들며 훌쩍 열차에서 내린다. 하이킹을 하려는 모양이다. 내 마음속에서는 저 아름다운 자연은 발로 걸어야 온전히 느낄 수 있다며 당장 내리라는 아우성이 요란하다. 빠듯한 여행 일정을 되새김질하며 가까스로 유혹을 뿌리친다.
2시간의 여정을 마치고 츠바이지멘 역에 도착했다. 열차에서 내려서야 프랑스어로 시작한 역 이름이 어느 틈엔가 독일어로 바뀌어 있음을 깨닫는다.
허름한 열차를 탔더라도 창 밖 풍광만으로도 행복했을 여행길에 열차마저 색다른 경험과 즐거움을 더해주는 나라 스위스. 그래서일까? 클래식 열차와 함께한 알프스는 유난히 짙은 여운을 남기며 다음에는 꼭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겠다고 다짐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