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
‘나인 투 파이브’
우리의 세 여자 주인공은 실수로 변태 상사를 독살할 뻔하다 그를 납치한다. 현실세계에서는 감옥에 들어가기 딱 좋은 불운이지만, 할리우드는 역시 할리우드다. 세 주인공은 그 일을 계기로 오히려 승진하거나 인격적으로 대접받거나 스타가 된다. 간신히 여기서 탈출한 변태 상사는 아마존 밀림으로 좌천됐다가 실종된다. 만세! 세상이 이렇게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이론으로 넘어가보자. 여기서 가장 추천할 만한 영화는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을 배리 레빈슨 감독이 영화화한 ‘폭로’란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성희롱의 가해자는 남자(마이클 더글라스)가 아닌 여자 상사(데미 무어)다. 이런 역할 전환의 의미는 무엇일까. 세상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이나 성추행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권력을 누가 쥐고 있느냐의 문제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성추행이 많다는 건 변태들이 많다는 게 아니라 자신이 이성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찌질이(?) 남자들이 많다는 증거다. 이 정도만으로도 이 작품의 비전은 유익하다.
비슷한 부류로 유익한 작품이 하나 더 있다. 결혼에 목을 매는 여자 주인공의 다소 짜증나는 행동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데이비드 E. 켈리의 법정 TV 시리즈 ‘앨리 맥빌’(앨리의 사랑 만들기)이다. 이 작품의 장단점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끝도 없겠지만, 성추행과 성희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영화는 상당히 좋은 사례가 된다.
시리즈의 무대가 되는 케이지 & 피시 법률회사는 섹스에 미친 변호사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는 성희롱이나 성추행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케이지 & 피시의 여자 변호사들이 회사 내에서 남자들과 동등한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여변호사 앨리 맥빌이 성희롱을 당한 곳은 그 이전에 다녔던, 보수적인 법률회사다.
케이지 & 피시에서 유일하게 성희롱 문제를 제기했다 패소한 사람은 말단 여직원이었다. 결국 이것은 권력의 문제라는 뜻이다. 성희롱으로 걸려든 사람들을 법정에 보내봐야 소용없다. 그래 봤자 재수없어서 걸렸다고 투덜거리다 자기네들을 받아줄 찌질이 클럽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와 같은 불평등한 상황 속에서 성희롱범들은 벌레처럼 계속 기어나온다. 중요한 건 동등한 권력을 잡고 존중을 받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해결책은 그렇게 명쾌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런 명백함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