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고건 전 총리, 이명박 시장, 정몽준 의원(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통제권을 벗어난 스포츠 스캔들은 이 전 총리를 낙마시킨 데 이어 서울시청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테니스 코트 속에 숨어 있던 대선주자들의 ‘코트 정치’가 실체를 드러낸다. 이를 지켜보는 테니스 동호인들은 2002년 선보였던 ‘기타 치는 대통령’에 이어 2007년에는 ‘테니스 치는 대통령’의 등장을 기대한다. 이명박 시장을 비롯,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고건 전 총리, 정몽준 의원 등 유력 대선주자들이 수시로 테니스 코트를 찾는 상황이어서 이들의 바람은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대선주자 가운데 고 전 총리의 테니스 사랑은 유별나다. 1월 고 전 총리가 한 사석에서 한 말이다.
“골프장에 가려면 차를 타고 교외로 빠져나가야 돼. 그 시간이면 테니스를 한두 게임 칠 수 있다. 테니스는 라켓과 공, 시합 후 먹을 설렁탕 한 그릇과 소주 한 병 값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고 전 총리는 골프공을 죽은 공이라고 말한다. 임팩트를 가할 때 움직이지 않고 정지한 것을 빗댄 표현이다. 반면 임팩트 순간 움직임이 큰 테니스공은 살아 있는 공이라며 애정을 보인다. 이 말 속에는 “죽은 볼을 무슨 재미로 치느냐”는 고 전 총리의 골프에 대한 거부감과 살아 움직이는 테니스공이야말로 수시로 변하는 민심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철학이 숨어 있다. 어깨 힘을 빼야 공이 잘 맞는다는 말도 국민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그의 대민철학의 다른 표현이다.
고 전 총리의 테니스 파트너는 전직 공무원과 교수, 변호사, 의사 등으로 구성된 상록테니스클럽 회원들. 수시로 파트너를 바꿔가며 테니스를 치고 경기가 끝나면 설렁탕과 소주잔을 기울인다. 고 전 총리의 한 측근은 “테니스를 친 뒤 갖는 스킨십을 통해 고건맨들이 하나 둘씩 늘어난다”고 설명한다. 테니스 모임이 우보(牛步)정치의 한 단면임을 암시하는 발언이다.
박근혜 대표, 코트에선 “고건 오빠”
고 전 총리의 테니스 정치 마당에는 전·현직 정치인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박근혜 대표도 그 가운데 하나. 두 사람의 신뢰관계는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출발한다. 고 전 총리는 잘살기운동 캠페인이었던 ‘새마을운동’의 이름을 만든 주인공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박 대표는 고 전 총리를 누구보다 신뢰한다. 박 대표가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있는 양재테니스클럽(양재클럽)에서 고 전 총리와 여러 차례 경기를 한 것도 이런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운동에 남다른 소질이 있는 박 대표와 고 전 총리의 테니스 실력은 막상막하라는 것이 한 측근의 관전평이다. 대권 대열에서는 경쟁자이자 정적이지만 코트에 서면 두 사람은 딴사람이 된다. 경기를 끝낸 뒤 가쁜 숨을 몰아쉴 때쯤이면 정치의 벽은 허물어지고 스포츠맨십만 남는다. 박 대표가 고 전 총리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도 이때쯤.
테니스를 치고 있는 모습들. 이명박 시장,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정몽준 의원, 고건 전 총리(왼쪽부터).
박 대표와 고 전 총리가 몇 차례 회동을 했던 양재클럽에는 또 다른 대권주자급 정치인이 드나든다. 만능 스포츠맨으로 알려진 정몽준 의원이다. 정 의원과 박 대표는 과거 이곳에서 자주 게임을 즐겼고, 이 때문에 최근 지방선거와 관련해 두 인사의 ‘코트 회동설’이 나돌기도 했다. 서울시장 후보 물색에 나선 박 대표가 정 의원과 몇 차례 직·간접 접촉을 시도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양재클럽 회동설로 이어진 것.
박 대표 측근은 “확인된 바 없다”고 해명했지만 코트 회동설은 자연스럽게 부각된다. 2002년 대선 당시 그들이 선보인 코트 정치가 워낙 강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당시 두 사람은 지금과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다. 국민통합21을 만들어 대선 출마를 노리던 정 의원은 한나라당을 탈당한 박 대표의 영입에 공을 들였다. 정 의원은 박 대표를 영입하기 위해 서너 차례 박 대표를 만나 설득을 시도했는데 그때 두 사람이 만난 곳이 바로 양재클럽이었다고 한다. 박 대표는 당시 정체성 차이를 이유로 정 의원의 제의를 거절했고, 결국 두 사람은 갈라섰다. 그때 헤어진 두 사람이 2002년 대선의 여운이 남아 있는 테니스 코트에서 지방선거와 2007년 대선을 둘러싸고 다시 한번 합종연횡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셈이다. 특히 이명박 시장도 측근들과 이곳을 찾아 수시로 게임을 즐겨 코트 위의 대선전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고 있다.
이들 외에 김상현 전 민주당 의원이 이곳을 찾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 2004년 총선에서 낙마한 그는 2007년 대선의 킹메이커를 자임하고 있다. 이철 한국철도공사 사장, 임창열 전 경기도지사, 김진선 강원도지사 등도 이 클럽을 찾는 멤버들이다.
20여명 일행에 게임메이커 동반
대선주자를 비롯해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코트를 찾을 때에는 20여 명의 일행을 동반한다. 이 멤버에는 게임을 자연스럽게 풀어주는 선수들이 반드시 포함된다. 한 테니스 애호가의 설명이다.
“A급 게임메이커는 경기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실력이 종이 두 장 차이로 벌어지면 재미가 없다.”
이런 룰을 지키지 않으면 낭패를 본다. 지난해 8월 대구 팔공산 인근 모 실내 테니스장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씨와 시합에 나섰던 K 씨가 그 경우. 다른 여성 동호인과 파트너가 된 K 씨는 아무런 생각 없이 김 씨에게 스매싱을 날렸다. 김 씨가 오랫동안 테니스를 쳤다고 하지만 남자의 강한 스매싱을 받아내는 것은 무리. 몇 차례 랠리가 끝난 뒤 보고 있던 경호원이 K 씨 앞에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할머니(김옥숙 여사는 1935년생)를 죽이실 작정입니까.”
이후 K 씨의 스매싱에는 힘이 빠졌다. 주의를 받은 K 씨가 접대 테니스 버전으로 돌아선 것이다.
게임메이커가 여성일 때도 많다. 그럴 경우 코트는 핑크빛으로 물든다. 서울 시내 몇 손가락 안에 드는 Z클럽 회원 B 씨는 동호인들한테서 ‘한국의 샤라포바’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170cm를 넘는 큰 키에 서글서글한 이목구비가 샤라포바와 비슷한 이미지를 풍기는 것. 특히 웬만한 남자를 능가할 정도로 게임운영 능력이 뛰어나 그와 게임을 즐기려는 동호인들이 줄을 선다. 원로 정치인 A 씨도 몇 차례 시도 끝에 그와 게임을 했고 감사의 표시로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서울 시내는 물론 전국의 테니스클럽에는 요즘 테사모(테니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조직된 곳이 많다. 이들은 “2007년은 테니스 치는 대통령을 배출해야 한다”는 말을 곧잘 입에 올린다. 2002년 노무현 후보가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란 영화를 패러디해 ‘기타 치는 대통령’을 선보였는데 이를 미래형 버전으로 바꾼 것이다.
테니스 동호인들은 청와대에서 테니스 경기를 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크다. 유력 대선후보들이 테니스 코트를 수시로 찾고 있어 실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살아 있는 공에 쫓기는 이 시장을 지켜보는 테니스 동호인들의 눈길이 뜨거운 것도 이런 꿈과 희망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