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영 대통령 연설기획비서관(왼쪽)과 노무현 대통령.
“정책을 제외한 대통령의 캐릭터와 리더십, 그리고 스타일 등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대통령의 인간적 면모는 물론 말과 글, 전달하려는 메시지 내용도 관찰한다.”
‘국정일기’ 통해 청와대 생활 소개
대통령의 캐릭터와 리더십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 일을 하려면 대통령과의 물리적 거리를 좁혀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루 15시간 이상 대통령과 함께 있기도 하고, 바깥에 알려지면 곤란한 말이나 행동과 마주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 일을 맡을 사람은 최측근밖에 없다. 윤 비서관이 노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보다 노 대통령을 더 자주 만나는 사람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최고 권력자와의 물리적 거리는 곧바로 파워와 비례하는 것이 권력사회의 불문율. 윤 비서관은 이 사실 하나만으로 자연스럽게 ‘노(盧)의 남자’로, 노 대통령의 복심(腹心)으로 통한다. 노 대통령도 현안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도움을 요청, 무게를 싣는다. 바깥에서는 이런 윤 비서관에게 시기와 질투어린 눈길을 보낸다. 청와대 일부 386 인사들도 윤 비서관의 이런 역할을 정치공학적으로 분석한다. 한 386 인사의 설명이다.
“안희정 씨나 이광재 의원(열린우리당)이 노 대통령 주변에 있을 때는 이런 역할을 나눠 맡았지만 그들이 빠진 뒤에는 대부분 윤 비서관이 소화한다. 정무 관련 비서관들이 있지만 역할에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386 참모들의 역할 대부분이 그에게 몰려 있다는 지적이다.
윤 비서관은 한때 노 대통령에게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고 암행에 나선 적이 있다. 노 대통령이 우리 사회의 미래과제 등과 관련한 아젠더를 설정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작업들을 추진하면서 윤 비서관을 핵심 멤버로 발탁한 것. 그러나 이 작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방향을 수정했다.
윤 비서관은 이에 대해 “현실적 여건 등을 감안, 그때그때 필요한 아젠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연두기자회견과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 등을 통해 단계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해법을 찾기로 했다는 것. 23일 노 대통령의 인터넷 대화는 그 일환으로 볼 수 있다.
3월23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패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당과 청와대가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당시 대통령의 감정이 상한 것은 당의 반대보다 진의가 잘못 전달됐기 때문이다.”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엄습하거나 정치적 결단의 순간이 오면 노 대통령의 고민이 깊어진다. 지켜보는 윤 비서관도 고통의 바다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최근 노 대통령은 이해찬 전 총리 사퇴 문제를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이를 바라보던 윤 비서관의 가슴도 타들어갔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생각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크고 넓다. 당은 정파적 입장만 생각하고, 참모는 참모로서의 할 일만 수행하면 된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 모든 것을 취합하고 종합적으로 판단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 과정에 철학도 내포돼야 한다. 총리를 물러나게 하고 새 총리를 선택하는 일이 바깥에서 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고민해야 할 요소들이 너무 많다.”
국민들은 노 대통령이 즉흥적이라고 몰아붙인다. 진중하고 무게를 가지라는 주위의 조언도 적지 않다. 옆에서 지켜본 노 대통령은 정말 즉흥적일까. 윤 비서관은 언론과 국민들의 이런 인식에 오류가 있다고 강조한다.
요즘 건배 구호는 ‘성공한 대통령’
“노 대통령을 두고 ‘승부사다’, ‘말이 많다’고 지적하는데 잘못된 선입관이라고 본다. 노 대통령은 절대 즉흥적이지 않다. 대통령은 정치적 사안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고민한 뒤 화두를 던진다.”
노 대통령의 말과 행동이 계산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말실수라고 언론이 보도한 경우도 정교한 계산에 따라 연출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윤 비서관의 ‘관전평’이다.
지근거리에서 노 대통령을 보좌하는 윤 비서관은 대통령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 무엇을 감추고 싶어하고 자랑하고 싶어하는지 금방 안다.
노 대통령은 참모들과 식사를 할 때 한동안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인 e-지원에 대해 장황하게 얘기를 늘어놓았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밤 11시에 e-지원 시스템에 들어가 보고서를 읽었고, 댓글을 남겼다는 얘기도 했다. 윤 비서관은 이런 발언을 통해 대통령이 e-지원 시스템 개발을 자랑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청와대의 일상은 지겨울 정도로 단조롭게 반복된다. 보고서로 시작해 보고서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식사 때부터 시작된 보고 및 회의는 잠자리 들기 전까지 이어진다. 이에 대해 윤 비서관은 “노 대통령의 깨어 있는 시간은 수많은 판단과 결단의 연속”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이기 십상이다. 노 대통령은 이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스스로 요가 스트레칭을 개발했다.
청와대는 노 대통령의 술 실력도 약화시켰다. 청와대 생활이 시작된 뒤 술을 먹을 기회가 거의 없어 알코올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면 노대통령은 음식을 잘 먹는다. 한때 바깥에 음식을 시켜 먹을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정해진 차림표대로, 식탁에 차려지는 대로 먹는다고 한다.
요즘 청와대를 찾는 손님들의 단골 건배사는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한다. 노 대통령의 하산길이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의미다. 그런 말을 듣는 노 대통령은 매일 꼬깃꼬깃 접힌 몇 장의 메모지를 들고 국정을 시작하고 참모를 만난다. 그 서너 장의 메모지에 대한민국의 오늘과 내일, 희망과 고민이 혼재한다. 임기 2년을 남긴 노 대통령의 메모지에는 과연 무슨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까. 윤 비서관은 “지킬 것은 지킨다는 원칙과 변화할 것은 변해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유연성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지난 3년을 되돌아보면 변한 것도 많고 변하지 않은 것도 많다. 남은 2년은 굳이 새로운 의제를 만들지 않아도 대통령은 무탈하게 임기를 마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남은 임기를 그렇게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