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구역으로 묶여 있는 중학동 77번지 일대.
광화문 바로 맞은편에 있어 금싸라기 땅으로 불리는 이곳이 이처럼 방치돼 있는 것은 종로구청의 무리한 재개발 추진 탓이다. 종로구청은 2000년 이 지역을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하고 2002년 K사에 재개발사업 시행인가를 내줬다. 그러나 지난해 7월, 대법원이 ‘인가를 취소하라’는 확정판결을 내림으로써 중학동 재개발사업은 5년 만에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법원이 이 같은 판결을 내린 것은 종로구청이 사업승인 과정에서 법적 절차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재개발사업 시행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시행사가 해당 구역 토지·건축물 소유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면적을 기준으로 할 때 전체 토지의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하지만 K사는 전체 토지의 40.49%, 국공유지를 제외한 사유지의 29.73%의 동의만 얻은 채 종로구청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에 종로구청은 6개월 이내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조건으로 인가를 내줬다. 바로 이 점이 재판에서 쟁점이 됐고, 결국 K사에 대한 시행인가가 취소된 것이다.
법원 판결 따라 재개발사업 원점으로
중학동 재개발사업을 원점으로 돌린 장본인은 ㈜미진통상 대표 최영환(79) 씨. 그는 중학동 토박이다. 미진통상 사무실이 들어서 있는 미진빌딩은 중학동 재개발 구역 내에 있는데, 그의 처가는 조선 후기 때부터 이 빌딩이 위치한 현재 자리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최 씨는 1964년 현재의 미진빌딩 자리에 미진통상을 세웠다. 미진통상은 일본에 자동차 부품 제조기술을 수출해 로열티 수입을 올리는 등 주로 일본과 거래하는 무역회사.
50년 넘게 무역업에 종사해온 최 씨의 마지막 꿈은 자신이 소유한 미진빌딩의 땅을 포함해 중학동에 고층 컨벤션 센터를 세우는 것이다. 그가 이러한 꿈을 품은 것은 풍수지리연구가 최창조 녹색대 교수의 풍수 해설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서울의 주산은 북악산이며 북악산의 정기는 경복궁(내명당)을 통해 기운이 뻗어나가다 동십자각에서 정점에 달한다. 동십자각을 건넌 정기는 일본대사관 자리에서 다시 정점을 이루는데, 대사관이 있는 지점이 바로 서울의 외명당에 해당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최 씨는 ‘동십자각과 일본대사관 중간에 고층 빌딩을 지어 정기 유출을 막겠다’고 결심하고 중학동 일대의 땅을 꾸준히 사들였다. 현재 그는 600여 평의 중학동 땅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2002년 7월 최 씨의 꿈은 좌절할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종로구청은 2000년 7월 중학동 일대를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했는데, 만 2년인 재개발 구역 지정 법적 만기일이 다 되도록 사업시행 인가를 신청하는 사람이 없었다. 재개발이 취소되면 최 씨 입장에서는 자신이 소유한 땅에 고층 빌딩을 지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셈(재개발 구역에서는 개별적인 건물 신축이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만기일을 하루 앞두고 K사가 종로구청에 사업인가 신청을 내면서 최 씨의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됐다.
“K사는 부랴부랴 돈을 빌려 24평짜리 땅을 사서 사업인가 신청을 냈습니다. 그리고 중학동 주민들에게는 저와 손잡고 사업을 추진한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도무지 신뢰가 가질 않습니다. 게다가 K사는 주거용 빌딩을 짓겠다는 계획입니다. 경복궁 바로 앞에 집집마다 빨래 널어놓는 아파트를 짓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후 K사는 재개발 구역 내 땅을 집중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2002년 말까지 K사가 사들인 땅은 모두 1284평. 모두 600억원이 동원됐다. 이 자금은 전부 군인공제회로부터 투자받은 것이다. 군인공제회는 ‘사업 완료 후 원금과 이자를 돌려받는다’는 조건으로 K사에 600억원을 투자했다.
K사가 땅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잡음도 적지 않았다. “K사가 ‘모든 지주는 동의했고 이제 당신만 남았다’며 협박했다”는 주민 증언이 나왔고, 미진빌딩 1층에 세들어 있던 국민은행은 ‘은행 안에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와 난리 치는 일이 자꾸 벌어진다’며 사무실을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최 씨는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3년에 걸친 송사 끝에 마침내 최 씨는 K사의 재개발사업 시행인가를 취소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컨벤션 센터를 지어 일본대사관으로 흘러들어가는 정기를 막겠다는 최 씨의 꿈은 여전히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재개발 구역 묶여 있어 개별 건물 신축도 불가
대법원 판결 직후인 지난해 3월 최 씨는 자신의 땅에 고층 빌딩을 짓게 해달라며 종로구청에 건축 허가신청을 냈다. 하지만 종로구청은 최 씨의 신청을 반려했다. 그의 땅이 포함된 중학동 일대는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됐기 때문에 개별적인 건물 신축은 할 수 없다는 것. 이에 최 씨는 행정소송을 냈지만 1심에서 패소한 상태. 최 씨는 “내가 직접 재개발사업 시행자로 나서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는 형편”이라며 답답해했다. K사가 이미 재개발 구역 2400평 중 1400평을 확보해놓았기 때문이다.
K사는 지난해 여름부터 다시 시행사로 인가받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14층짜리 건물을 지으려는 애초 계획을 수정해 22층짜리 주상복합 아파트를 짓겠다는 것인데, 이미 서울시 심의까지 통과한 상태다. K사가 시행인가를 획득한다면 최 씨는 K사에 평생을 바쳐 일궈온 땅을 내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하지만 최 씨는 “불법적으로 사업을 추진한 전력이 있는 K사에 다시 재개발사업시행권을 준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우리 민족에게 더없이 귀중한 땅을 마구잡이식으로 개발하려는 K사에 절대 맡길 수 없다”며 “내 소유의 땅을 넘겨주느니 차라리 사회에 기부하겠다”고도 말했다. 이에 대해 K사의 김모 대표는 “최 씨와의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해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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