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의 초등학생들이 ‘고누 놀이’를 즐기고 있다.
이 씨는 공동육아협동조합(이하 조합) ‘하늘땅’(경기 의왕시 내손2동)의 보육교사다. 이 씨가 부모로서 ‘함께 키우기’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7년. 그는 “자연에서 아이들을 마음껏 놀게 한다”는 공동육아의 모토에 매료돼 경기 의왕시에 조합을 세웠다.
“큰아이를 낳아 기르던 동네(서울 관악구 신림동)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귀한 주택가였어요. 둘째 아이까지 낳아 기르는 동안에도 ‘이렇게 아이를 키우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대안을 찾지 못했죠.”
‘부모들이 함께 모여 육아를 한다? 그것도 자연에서 뒹굴며 놀게 한다?’ ‘다시 직장 일을 시작할 수 있겠다!’ ‘아이들에게 나비와 꽃도 실컷 보여줄 수 있겠다!’ 그렇게 시작한 함께 키우기는 이 씨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아이들은 참으로 잘 자라주었습니다. 자연을 만끽하며 이웃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아이들만 깨친 게 아니에요. 남편과 저도 늙어 저세상에 갈 때까지 정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이웃들이 생겼습니다. 그사이 공동육아 부모에서 교사가 되기도 했고요.”
팍팍한 도시생활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공동육아가 소리 소문 없이 번지고 있다. ‘(사)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에 가입한 ‘어린이집’과 ‘방과후(초등학생 공동육아)’만 각각 60곳, 19곳에 이른다. 함께 키우기는 일반에겐 다소 생소한 개념. 공동육아는 글자 그대로 ‘부모들이 모여 집과 교사를 구하고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것이다. ‘함께 키우기’ 전도사인 (사)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황윤옥 사무총장의 설명이다.
“10~30명의 부모들이 300만~1000만원의 출자금을 내 경치 좋은 곳에 집을 얻거나 삽니다. 그러고는 여러 아이들을 맘껏 뛰놀게 하며 함께 키우는 겁니다. 텃밭을 얻어 고추·토마토·열무·아욱을 키우면서 아이들과 부모들은 자연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배우지요.”
함께 키우기의 뿌리는 저소득층 어린이를 지원하기 위해 1978년 세워진 ‘해송어린이걱정모임’. 94년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첫 조합 ‘우리’가 조직됐고, 우리 졸업생들이 초등학생이 된 97년부터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방과후’가 등장했다.
아이들과 부모들 자연의 관계, 사람의 관계 배워
공동육아의 핵심 철학은 ‘관계 맺음’이다. 아이들에게 ‘자연과 얽히는 법’, ‘사람과 얽히는 법’을 가르치겠다는 것이다. 공동육아로 자라는 아이들은 자연을 벗삼아 생명과 순환의 섭리를 깨닫는다. 함께 키우기의 ‘공동 주주’인 부모와 어린이 교사는 평등한 공동체적 삶을 경험하면서 주변과 관계 맺는 방법을 깨친다.
3월7일 오전 10시 서울 광진구 아차산. 조합 ‘산들’(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교사와 ‘아마(아빠와 엄마를 줄인 말로 부모 일일교사 혹은 자원봉사자)’, 어린이들이 ‘나들이’를 나왔다. 아이들은 매일 아침 자연으로 여행을 떠난다. 바람과 햇볕을 느끼며 뛰어노는 아이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여섯 살 민영이는 제철보다 이르게 싹을 틔운 푸른 새싹을 신기한 듯 쓰다듬는다. 회사에 월차휴가를 내고 아마를 나온 송주경(35) 씨는 아차산을 오르면서 “아이가 뭉게구름의 여러 얼굴을 볼 수 있고, 매일 새로운 노을을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공동육아에선 나들이를 ‘밥’에 비유한다. ‘산들’의 박정화 대표교사는 “밥을 먹으면서 에너지원을 공급받듯 아이들은 나들이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키운다”고 했다. 날씨가 아주 춥거나 비가 오지 않으면 전국의 공동육아 아이들은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나들이를 한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하루 종일 놀다 오는 ‘긴 나들이’를 떠난다.
3월8일 오전 7시30분. 경기 안양시 비산동 조합 ‘친구야 놀자’의 ‘터전’에 부모와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아침밥을 먹지 못하고 온 아이들은 영양교사가 유기농(공동육아는 모든 식사를 유기농으로만 만든다)으로 자란 곡식으로 만들어준 죽으로 배를 채운다. 부모들이 아이를 데려오는 시각은 7시부터 9시까지 제각각 다르다. 부모가 퇴근해 데리러 올 때까지 아이들은 7명의 교사 및 아마와 생활한다.
‘내 아이’에서 ‘우리 아이’로 바뀐 교육 공동체
“뒷무덤가에서 놀았다며, 약수터로 나들이를 다녀왔다며, 아이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흙먼지를 털어냅니다. 진흙투성이가 된 신발을 보며 엄마한테 미안한지 쭈뼛거리면서도 밝게 웃습니다. 아이의 웃는 얼굴은 ‘엄마, 나 오늘 하루도 신나게 놀았어요~!’라고 말하는 듯해요. 감자·콩·김 단 세 가지 반찬만으로 하루 세 끼를 다 해결할 만큼 편식이 심하던 아이가 이젠 김치도 먹어야 하고, 당근도 먹어야 튼튼해진다며 스스로 먹기를 시도합니다. 그래도 자기에게는 대단한 도전인 양 한참을 뜸 들이고 어려워하면서도 곧잘 먹습니다.”(공동육아로 아이를 키우는 작가 강정옥 씨·32)
공동육아의 가장 큰 장점은 아이들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보는지, 무엇을 하는지를 부모가 속속들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안전한 먹을거리로 잘 먹이는 일,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일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공동육아는 부모와 교사, 아이가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누고, 문제를 풀어나가는 교육 공동체다. 조합원들은 아마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내 아이’에서 ‘우리들의 아이’로 무게중심이 옮겨간다.
“함께 키우기를 시작한 뒤로 아마 활동도 해야 하고, 방모임도 해야 하고, 터전 청소도 해야 해서 많이 바빠졌죠.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을 얻었습니다. 육아 스트레스에서 해방된 아빠 엄마의 웃음, 그리고 아이의 행복이 그것입니다.”(회사원 이세연 씨·34)
함께 키우기에 나선 부모들의 노력은 헌신적이다. 이 씨는 “회사 일 하랴, 조합 일 하랴 몸은 솔직히 너무 고되다”면서도 “좋은 먹을거리를 먹이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맞벌이 부부에겐 공동육아가 최선의 선택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모들은 ‘교사 아마’ ‘이불빨래 아마’ ‘차량 아마’ 등 생활의 상당 부분을 공동육아에 할애해야 한다. 아빠들도 예외가 없다. 육성철(37·공무원) 씨는 “함께 키우기는 남성들을 양성평등의 세계로 뛰어들게 한다”면서 “이른 새벽, 터전 아이들 먹일 김밥을 싸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10여명의 ‘친구야 놀자’ 햇살방(7세) 조합원들이 3월8일 저녁 ‘방모임’을 위해 허구영(40·화가) 씨 집에 모였다. 방모임은 부모와 교사들이 함께 터전의 운영 방식과 커리큘럼을 논의하는 회의다. 7시에 시작한 회의는 11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깁밥 당번’과 ‘이불빨래 순서’를 정하는 건 금세 끝났으나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공방나들이(도자기 굽는 법을 배우는 것)’가 문제였다. “공방나들이는 일종의 과외다. 공동육아 정신에 위배된다”는 한 부모의 주장에 토론이 불을 뿜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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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텃밭 체험을 통해 아이들은 자연과 ‘관계 맺는 법’을 배운다. ② ‘황토염색’을 비롯해 다채로운 야외활동도 자랑거리. ③ 장구 치기, 사물놀이는 공동육아의 기본 커리큘럼이다. ④ 아이들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이불 개기 등 규범을 자연스레 배운다. ⑤ 노래와 율동을 배우고 있는 아이들.
부모들이 공동육아를 선택한 까닭은 ‘아이들을 마음껏 뛰어놀게 하고 싶어서’, ‘아토피성피부염을 고쳐주기 위해서’ 등 제각각 다르다. 목적이 다르다 보면 충돌이 일어나게 마련. “공부를 조금은 시켜야 하지 않느냐”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공동육아의 기본 정신을 철저하게 따라야 한다”는 조합원도 있다. 공동육아는 이런 갈등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사와 부모들의 합의에 따라 풀어나간다.
“아이한테 친구 만들어주려고 시작했다가 제 친구들이 늘었습니다. 아이 가르치려고 시작했다가 제가 더 많이 배웠고요. 함께 키우기는 공동체적 삶과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부모들을 재사회화하는 도구로도 기능합니다. ‘참여 보육’이면서 일종의 ‘공동체 운동’인 셈이죠.”(공동육아로 아이를 키우고, 현재는 ‘별나라삐삐넷’이라는 이름의 공동육아용품 인터넷쇼핑몰을 운영하는 곽영선 씨)
공동육아로 자라는 아이들은 어린이집이건, 방과후건 터전에선 숙제를 제외한 ‘학과 공부’를 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대신 장구, 사물놀이 등 ‘우리 것’을 배우고 틈나는 대로 밖에서 뛰어논다. 3월15일 오후 경기 과천시의 한 초등학교. 초등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오징어달구지’ ‘비석치기’ ‘사방놀이’를 하느라 분주하다. 방과후 과정을 운영하는 조합 ‘두근두근’(1~2학년)과 ‘한발 먼저’(3~6학년)의 터전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다.
“학교 파한 뒤에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은 터전 아이들밖에 없어요. 다른 아이들이 ‘학원 뺑뺑이’를 돌고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컴퓨터 게임을 할 때, 80년대까지 으레 초등학생들이 그랬듯 밖에서 뛰어노는 것이지요.”(‘두근두근’ 교사 방극조 씨·34)
비석 치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 또래와의 ‘야외 놀이’는 인격 형성과 신체 발달에 도움을 준다.
초등학교 들어가면 3~6개월 적응기간 필요
‘한발 먼저’는 해마다 30일가량 ‘들살이’를 떠난다. 여름방학엔 8박9일씩 여행을 떠나고 학기 중에도 3박4일씩 여러 차례 들살이를 즐긴다. 6학년 정민이와 재준이가 “문경새재의 제1관문이 아름다웠다”(정민), “아니다. 제2관문이 더 멋있었다”(재준)면서 다투는 표정이 진지하다. 제법 소녀티가 나는 정민이는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좋고 풍물놀이도 재미있다”면서 “학교와 달리 남자, 여자가 같이 놀고 나이에 상관없이 어울려 지내는 게 너무 좋다”며 웃었다.
초등학교 입학 이전의 ‘함께 키우기’는 부모와 아이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 그러나 방과후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아이들의 만족도는 높지만 부모들의 평가가 엇갈리는 것. 함께 키우기가 표방하는 전인교육이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데 득보다 실이 많을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다. 실제로 터전에서 생활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적응하는 데 3~6개월 정도가 소요되기도 한다.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방과후’ 문제는 공동육아 전체의 고민입니다. 방과후 교사들도 부모들의 조바심과 공동육아의 근본정신 사이에서 걱정이 많아요. 부모와 교사들이 함께 토론하고 현실에 맞춰 변화해가다 보면 좋은 해법을 찾을 거라고 봅니다. 공동육아를 할까 말까 고민하는 부모들에게 함께 키우기로 자란 아이들은 공부 걱정 같은 건 안 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한양대 정병호 교수·(사)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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