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91

2007.06.26

예술인 씨 뿌리고 부자들 물 주고

세계 최강 뉴욕 문화 19세기 말부터 화려하게 꽃피워

  • 송보림 brs77@columbia.edu

    입력2007-06-20 16: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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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인 씨 뿌리고 부자들 물 주고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거리와 뮤지컬 ‘캣츠’(작은 사진).

    “풍요로운 문화생활 때문에 뉴욕을 떠날 수가 없어요.”

    뉴요커에게 집세와 생활비가 비싸기로 악명 높은 맨해튼에 사는 이유를 물으면 분명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이는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몇 년 전 실시한 ‘왜 뉴욕에 사는가’라는 질문의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답변이다.

    카네기홀·브로드웨이·MoMA 등 명소 즐비

    뉴욕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문화의 중심지다. 정치·사회·경제 등 뉴욕이 독보적 존재로 자리잡은 분야가 비단 문화계만은 아니지만, 사계절 내내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붐비는 데는 역시 문화의 힘이 가장 크다.

    뉴요커들의 뉴욕 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앞의 설문조사 결과처럼 대단하다. 물론 바쁜 생활에 쫓겨 기대만큼 문화생활을 즐기지는 못하지만(실제 설문조사 결과가 그랬다), 뉴요커라면 누구나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무용 패션 건축 문학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각기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도시에서 산다는 뿌듯함을 가지고 있다. 뉴욕에서 6년 동안 지낸 나는 뉴욕 문화를 ‘꿈과 현실 사이의 치열한 줄다리기에서 비롯된 원동력이 낳은 성과’라고 정의하고 싶다.



    뉴욕은 꿈을 지닌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미국에서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려는 예술가들이 뉴욕으로 모여든다. 뛰어난 재능과 세상을 조금 달리 보는 독특한 시각을 가진 예술가들은 모이는 지역마다 멋들어지게 변화시키곤 했다. 소호가 그랬고, 그리니치 빌리지가 그랬다. 예술가의 영혼이 입힌 그 거리는 어김없이 부동산 가격이 뛰었고, 덕분에 예술가들은 내쫓겼다. 소호가 명품 매장이 가득한 거리로 바뀌는 대신 브루클린의 덤보가, 윌리엄스버그가 새롭게 반짝이는 예술가 동네로 떠올랐다. 뉴욕에 대한 예술가들의 열망과 애정이 지속되는 한 이런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예술가들이 뉴욕을 열망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뉴욕 문화예술의 수준이 세계 정상급이기 때문에 자연 세계 최고 무대에 서고 싶은 것이다. 링컨센터와 카네기홀을 중심으로 한 뉴욕의 클래식 음악기관은 단연 세계 최고 공연장이다. 뉴욕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케스트라 중 하나다.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의 고향인 뉴욕에는 첼시 지역을 중심으로 현대미술 갤러리가 대거 들어섰고, 이곳 갤러리에서는 현재 세계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들의 전시가 계속되고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MoMA), 구겐하임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등의 유명 미술관도 세계 각국의 관람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연극 공연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성이 높다. 그 유명세와 더불어 해마다 수많은 작품이 창작되고 무대에 올려진다는 사실이 브로드웨이의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 ‘모비딕’의 허먼 멜빌, 월트 휘트먼, 에드가 앨런 포, 극작가 유진 오닐을 배출하고 1920년대 ‘할렘 르네상스’라 불리는 흑인 중심의 문학운동을 꽃피웠던 뉴욕은 여전히 문학의 중심지로 남아 있다. 또한 미국 근대무용을 탄생시킨 뉴욕 곳곳에서는 세계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는 무용 공연이 계속되고 있다.

    예술인 씨 뿌리고 부자들 물 주고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시 해마다 문화예술 분야에 엄청난 투자

    뉴욕 문화가 20세기에 꽃피울 수 있었던 밑바탕은 19세기에 형성됐다. 1872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91년 카네기홀이 문을 열었다. 이 기관들은 뉴욕 부유층의 기부와 지원에 힘입어 소장품이 늘어났으며 유명 음악가의 공연을 개최할 수 있었다. 20세기 들어서는 규모가 더 확대된다. 미술 분야의 경우 1913년 뉴욕에서 열린 세계근대미술전시회가 뉴욕 미술문화 발전의 기폭제 구실을 했다. 이 전시회에 포함된 입체파와 후기인상주의 등 유럽 유명작가들의 작품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로써 뉴욕의 부유층 미술애호가들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금을 내놓는 계기가 마련됐다. 이런 과정을 통해 MoMA

    (1929), 휘트니 미술관(1931), 구겐하임 재단(1937) 등이 설립됐다.

    1930년대에는 많은 유럽 근대미술가들이 뉴욕으로 이주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들은 뉴욕에서 자기만의 독특한 미술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1950년대에는 잭슨 폴록, 윌리엄 데 쿠닝, 마크 로스코 등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가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이 미술운동은 뉴욕을 미술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하는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추상표현주의의 성공은 1960년대 앤디 워홀을 비롯한 팝아트의 명성으로도 이어졌다.

    이러한 활약 밑바탕에는 뉴욕을 문화 중심지로 키우기 위한 미국의 전략적인 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한 예로 미국 정부는 미국 미술을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한 대규모 해외 전시에 재정 보조를 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시대에 미국 미술을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다. 아무튼 그 결과 뉴욕은 프랑스 파리를 제치고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뉴욕이 여전히 세계문화계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21세기 초반 현재에도 뉴욕시가 해마다 문화예술 지원금으로 쏟는 예산은 엄청나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이 경제적 지원만으로 가능하지 않았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 뒤에는 각 영역의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존재했고, 그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다.

    이민자들이 꽃피운 문화인 만큼 뉴욕 문화를 대표하는 특징은 다양성이다. 이민 올 때는 몸만 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태어난 곳의 문화를 토대로 뉴욕 땅에 정착한다. 그리고 서로 충돌하고 흡수하고 진화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낸다. 그 진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뉴욕에는 언제나 다양한 문화와 언어로 가득하다.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은 세련되고 멋들어지기보다 질퍽질퍽한 생명력을 가진다. 꿈을 좇으며 현실과 줄다리기하는 사이 생겨나는 고단함과 치열함이 떠받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질퍽함은 뉴욕 문화가 앞으로도 쉽사리 힘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게 한다.

    뉴욕 밖에서 ‘뉴욕 스타일’이라고 소개되는 문화에 뭔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이 때문인 듯하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처럼 프라다 백을 메고 지미 추 구두를 신고 멋지게 걷는 5번가 거리의 아가씨 옆으로 하루 종일 땀 흘리며 짐을 나르는 남미계 불법체류자가, 하루 24시간씩 밤낮 없이 영업하는 한국 음식점이, 정신없지만 활력 넘치는 차이나타운이 공존하는 곳이 뉴욕이다. 그리고 뉴욕은 그 공존에서 가장 큰 힘을 얻는다. 이러한 이유로 뉴욕의 첫인상은 ‘시크’하지 않다.

    공존하는 모두와 그들 개개인의 문화 존중

    예술인 씨 뿌리고 부자들 물 주고

    뉴욕현대미술관.

    뉴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맞춤옷처럼 재단된 도시가 아닌, 이민자들이 서로간의 문화를 짜고 엮어 만들어낸 스웨터 같은 도시다. 뉴욕은 공존하는 모두와 그들 개개인의 문화를 존중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발산되는 에너지를 소중하게 키워나간다. 그리하여 뉴욕의 맨해튼은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색다른 문화가 튀어나온다.

    최근에는 거의 한 달에 한 명씩, 서울에서 지인들이 뉴욕으로 출장을 온다. 그만큼 뉴욕과 한국의 교류가 활발하다는 뜻일 것이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뉴욕의 세련됨뿐만 아니라 땀냄새의 소중함을 온몸에 각인하는 뉴요커들의 질퍽한 삶에 대한 자세, 그리고 그런 자세를 가능하게 한 다양성의 문화도 한국으로 흘러 들어갔으면 좋겠다. 뉴욕에 공존하는 천차만별의 사람들과 문화, 그들의 꿈과 눈물이 함께 어우러낸 조화야말로 뉴욕이 세계 최강의 문화를 자랑하게 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송보림 씨는 화가이자 미술교육자로 현재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마무리 중이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아르떼진’의 미국 통신원, 미주 중앙일보 ‘송보림의 미술로 배우는 세상’의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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