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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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코스터’ 탄 BBK 연루 의혹 남매

김경준·에리카 김 씨 한때 아메리카 드림 상징 … 구속과 경제적 어려움 겹쳐 추락 중

  •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7-06-20 15: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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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러코스터’ 탄 BBK 연루 의혹 남매
    1980년대 중반 미국 ‘차터 오크(Charter Oak)’ 주립고등학교 졸업식장. 졸업생 중 수석을 차지한 한인 1.5세대 한 학생이 무대에 올랐다.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답사는 훌륭한 청년으로 키워주신 부모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잠시 뒤 한국 노래 ‘어머니의 은혜’를 영문으로 번역해 낭독하자 주위가 숙연해졌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졸업식장은 순식간에 눈물바다로 변했다. 너무도 헌신적이고 절절한 사랑이 담긴 가사는 미국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던 것. 이 ‘사건’은 미국 ‘LA타임스’에 실릴 정도로 화제를 모았고, 학생은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최근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투자운용회사 BBK 연루 의혹을 계기로 국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옵셔널벤처스 전 대표 김경준(41·미국 이름 크리스 김) 씨의 청소년 시절 이야기다. 이 전 시장과의 친분관계로 언론지상에 오르내리는 김씨의 누나 미혜(43·에리카 김) 씨도 2년 먼저 같은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한 수재였다.

    고등학교 수석, 명문대 졸업한 수재들



    20여 년이 흐른 지금, 김씨 남매는 이 전 시장과 악연으로 얽혀 있다. BBK 투자사기 사건과 옵셔널벤처스 자금횡령 및 주가조작 의혹사건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적대관계가 돼버린 것이다. 과연 이 남매는 어떤 사람들이고, 이 전 시장과의 악연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남매에게는 경모(스캇 김)라는 남동생이 한 명 더 있었다. 1970년대 초, 3남매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이민을 선택한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부모는 명문인 연세대와 이화여대 출신으로 국내에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미국행을 선택했던 당시 에리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고, 동생 김씨는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이 가족이 미국 이민사회에서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첫 직장은 친척이 운영하는 주유소 종업원이었고, 어머니는 공장에서 일했다. 부모는 이후 꾸준히 돈을 모아 캘리포니아 온타리오 지역에서 와인을 주로 판매하는 리커 숍(Liquer shop)을 운영하며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에리카와 동생 김씨는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한 이후 탄탄대로를 걸었다. 미국의 명문대 중 하나인 코넬대학 정치학과를 거쳐 UCLA 법학대학원를 졸업한 에리카는 1990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6세에 불과했다.

    에리카가 코넬대학 시절 가깝게 지낸 한 지인은 에리카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재학 시절 에리카는 굉장히 똑똑하고, 수많은 학생 중에서도 눈에 띄게 공부를 잘했다. 밝고 명랑하고 활달하고 적극적이었으며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인기도 많았다.”

    에리카 부모와도 가깝다는 다른 지인도 “에리카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다. 부모님은 믿음이 깊고 성실한 분들로 기억한다. 에리카도 예쁘고 똑똑할 뿐만 아니라 착했다”고 말했다.

    ‘롤러코스터’ 탄 BBK 연루 의혹 남매

    2000년 11월 당시 이명박 전 시장과 LK-ebank를 함께 운영하던 김경준 씨가 이 전 시장 인터뷰를 위해 사무실을 방문한 박영선 기자(현 열린우리당 의원)에게 회사를 소개하고 있다.

    한편 코넬대학 경제학과에 들어간 동생 김씨는 대학 총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하는 등 남다른 추진력과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후 시카고대학 석사과정에 이어 펜실베이니아 경영대학원 MBA 과정을 거쳤다. 경영 및 경제학과와 관련해 미국 내 최고 과정을 섭렵한 것. 그는 미국 금융의 중심지인 뉴욕 월스트리트에 진출해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남매는 미국 LA 법조계와 뉴욕 금융계에서 나름대로 인정받으면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렇다면 이들과 이 전 시장의 관계는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시작된 것일까.

    LA 현지 변호사와 기업인, 주한 미 대사관 관계자 등 과거 에리카와 친분이 있었던 이들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에리카와 이 전 시장의 관계가 시작된 것은 94년경부터로 보인다.

    당시 국회의원 신분이던 이 전 시장이 LA를 방문했을 때 한 교회에서 지인의 소개로 에리카와 만났다는 것. 두 사람을 연결해준 사람은 LA에서 현재 신용정보회사를 운영하는 이모 씨로 알려진다.

    1995년 국내 한 호텔에서 열린 에리카의 자서전 ‘나는 언제나 한국인’ 출판기념회에도 이 전 시장이 참석했고, 당시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특기할 점은 출판기념회에 내로라하는 국내 정관계 인사가 수백명 몰렸다는 것. 국내에 별다른 연고가 없고 인맥도 없었던 에리카의 출판기념회에 그렇게 많은 정관계 인사가 몰린 것 자체가 의문이 들 법한 일이었다.

    당시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출판기념회를 주최한 출판사 측 관계자한테서 전해들었다”면서 그 배경을 좀더 상세히 설명했다.

    “이 전 시장과 에리카를 연결해준 이씨가 워낙 발이 넓었다. 한때 박모 전 의원의 후원회 LA 지부를 관리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실세였던 홍모 전 의원, 김모 교수 등과도 가까웠다. 그 사람이 출판기념회 때 섭외를 다 했다. 이 전 시장 등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이름을 초청장에 넣어서 돌린 것도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국내외에서 인맥을 넓힌 에리카는 이후 더욱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의 변호사 사무실도 나날이 번창했다. 97년 8월 미국령 괌에서 일어난 대한항공기 추락 참사 때 유족 대표 변호사로 사고보상금 등을 받기 위한 법적 처리를 도맡아 큰 수임료를 벌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변호사 누나가 이명박 씨에게 동생 소개

    에리카의 전공 분야는 상법이다. 회사와 비즈니스 관련 분야에서는 실력 있는 변호사라는 것이 LA 현지 한 법조인의 평가다. 에리카는 LA 현지 한국인 방송 ‘라디오 코리아’에 고정 코너를 맡아 교민 대상으로 법률상담을 해주고, 신문에도 칼럼을 자주 썼다.

    그러던 98년 말 이 전 시장이 선거법 위반 재판과정에서 의원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에리카와 이 전 시장은 좀더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진다. 에리카가 동생 김씨를 소개한 것도 이 무렵 전후였을 가능성이 높다.

    ‘롤러코스터’ 탄 BBK 연루 의혹 남매

    1995년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에리카 김 자서전 출판기념회에서 이명박 전 시장과 에리카 김 가족이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미국 월 스트리트의 모건스탠리 등 세계적인 증권사에서 근무하다 외환위기 직후인 98년경 국내로 들어온 김씨는 환은살로만스미스바니증권 서울지점 등에서 일했다. 이때 파생상품, 특히 아비트리지(차익) 거래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99년 초 회사를 그만둔 김씨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지 않는다면서 회사를 상대로 퇴직금과 성과급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결국 회사 측은 김씨와 일정한 금액에 합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일까. 당시 김씨와 같은 회사에 근무했던 한 상급자는 김씨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다.

    “똑똑한 사람인데 인생을 길고 진실되게 사는 방법을 알았으면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텐데…. 철학적, 인격적,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좀 있는 사람이다.”

    김씨가 최근 이 전 시장과의 관련 의혹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투자운용회사 BBK를 만든 것은 99년 4월이다. 그리고 2000년 2월 이 전 시장이 만든 LK-ebank에 참여한다. 회사 설립 당시 이 전 시장이 39만9997주를 보유한 반면, 김씨가 보유한 주식은 단 1주였다. 김씨는 얼마 뒤 유상증자를 통해 30억원을 투자했다.

    한편 99년 말 에리카와 김씨는 동생 경모 씨를 잃는 시련을 겪었다. 경모 씨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

    2000년 중·후반부터 이 전 시장과 김씨는 조세회피 지역인 버진아일랜드에 MAF 펀드를 만들어 투자를 유치한 뒤 복잡한 자금거래를 시작한다. 그 과정에 에리카도 참여했다. 전공 분야인 상법에 대한 지식이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잘나가던 집안 이젠 풍비박산”

    그러던 2001년 3월 BBK에 대한 금감원 조사를 통해 펀드운용보고서 위조와 투자운용전문인력 허위보고 등의 혐의가 드러나 4월 대표이사 해임 및 폐쇄통보가 내려졌다. 김씨는 BBK를 통해 인수한 옵셔널벤처스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때부터 김씨는 더욱 치밀한 불법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한다.

    국내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김씨는 사망한 동생의 여권을 위조해 범죄에 이용했다. 자신의 여권으로 미국으로 나갔다가 동생의 여권을 이용해 국내로 다시 들어와 가장 납입과 주가조작을 벌인 것. 여권상으로 보면 김씨는 해외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완벽했다.

    2001년 12월 사실상 미국으로 도피한 이후 김씨는 LA에서 아무런 활동 제약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돈을 물 쓰듯 쓰면서 호화 사치행각을 벌였다.

    LA 연방법원 등에 가압류된 김씨의 재산 현황과 미 연방수사국(FBI) 수사기록을 확인한 현지 한 국제변호사에 따르면 김씨는 2002년 3월 LA 최고 부촌인 베벌리힐스의 저택을 320만 달러에 구입하고, 같은 해 8월 같은 동네에 또 한 채의 저택을 에리카 명의로 구입했다.

    김씨는 또 2001년 12월부터 2002년 4월까지 벤츠 S500, 벤츠 CL5000, 페라리, 포르셰 2대, 랜드로버 등 초고가 명품차들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특히 2003년 10월부터 2004년 3월까지는 어디선가 세탁된 자금 1500만 달러가 김씨의 스위스은행 계좌로 들어왔다. 과연 이처럼 막대한 자금의 출처는 어디일까?

    비슷한 시기 에리카도 인생의 황금기를 맞는다. 2003년 여성으로는 최초로 LA 한인상공회의소 회장에 뽑혔다. 당시 39세의 나이도 역대 최연소였다.

    에리카는 같은 해 5월 LA시 인간관계위원회(Human Relations Commission) 위원으로 임명됐다. 에리카가 당시 LA 시장이던 제임스 한의 정치헌금자 중 한 사람이었던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리고 그해 8월 김씨도 LA시 산업개발위원회 위원이 됐다.

    하지만 남매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2004년 5월27일 김씨가 FBI에 전격 체포, 구속된 것이다. 김씨의 모든 재산은 미 정부에 가압류됐고, 에리카는 한인상공회의소 회장은 물론 LA시 인간관계 위원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후 에리카의 변호사 사무실에 접수되는 소송건도 크게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UCLA 신경내과 전문의인 남편과 이혼하기도 했다.

    한때 에리카와 김씨, 그의 가족은 LA에서 성공한 집안으로 평가받았다. 친척들도 대부분 목사와 교수 등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까지 올라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그의 가족과 절친했다는 한 지인의 이야기가 안타깝게 다가온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던 집안이다. 하지만 지금은 풍비박산났다. 막내아들은 백혈병으로 죽고, 남은 아들 하나는 구속되고, 이혼한 딸은 갈수록 상황이 어려워지고…. 가족에게는 이제 아름다웠던 추억만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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