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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배우는 논술

인간 정체성의 미래

  • 박진성 엘림에듀 논술연구소 상임연구원

인간 정체성의 미래

인간 정체성의 미래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구 5명당 1기(機)의 로봇이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2035년의 미국 시카고, 강력계 형사인 스프너(윌 스미스 분)는 ‘로봇 혐오증’이라고 할 만큼 로봇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로봇 제조회사 USR의 로봇 공학자 래닝 박사의 자살사건이 맡겨진다. 현장에 도착한 스프너는 래닝 박사의 연구실에 숨어 있던 신형 로봇 써니를 발견하고 써니가 박사를 죽였다는 심증을 바탕으로 써니를 붙잡아 조사한다. 그런데 써니는 다른 로봇들과 달리 ‘너무나 인간적’이다. 먼저 그는 동일 모델의 다른 로봇들과 달리 ‘써니’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기도 하고,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며 꿈도 꾼다.

인간에게 위해(危害)를 가할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된 로봇을 살인 용의자로 지목하는 스프너는 과대망상환자 취급을 받고, 로봇이 살인사건에 연관되는 것을 원치 않는 USR의 압력에 따라 써니는 석방된다. 사건에 의구심을 품은 스프너는 래닝 박사의 행적을 조사하고, 그 과정에서 로봇들의 공격으로 생명에 위협을 느낀다. 어느 날 로봇들은 인간들을 집 안에 가두고 인간에 대한 공격과 통제에 나선다. 스프너는 래닝 박사의 죽음과 로봇들의 반란이 모두 USR의 중앙컴퓨터인 비키(VIKI)의 음모라는 것을 알고, 써니와 함께 비키를 파괴하여 사건을 해결한다. 이 과정에서 스프너는 로봇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고 써니와 친구가 된다.

인간과 기계(로봇)의 갈등을 축으로 인간과 기계의 상호 신뢰와 화해·공존을 모색하는 영화는 ‘아이, 로봇’ 말고도 ‘터미네이터’ ‘매트릭스’ 시리즈 등 다양하다. 이런 영화들의 주제와 관련해 말하자면, 인간과 기계의 공존은 불가피해 보인다. 당장 손안의 휴대전화가 사라지면 불안해 못 견디고, 컴퓨터가 고장나기라도 하면 학습이나 업무에 지장을 받는 현대인의 삶을 생각할 때 기계와 인류의 공존은 이미 선택사항이 아니다.

What am I?

기계문명의 정점에서 탄생할 ‘인간과 같은 로봇’을 두고 생각해보아야 할 정말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인간의 실존적 상황의 변화는 눈앞에 다가와 있다. 2006학년도 한양대와 서강대의 정시 논술고사는 이런 현실을 반영하여 출제됐다. 한양대의 경우 인간의 모든 능력을 부여받은 로봇의 이미지와 설명을 제시하고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묻고, 인간과 기계의 공존이 불가피한 미래사회를 그린 영화를 참고로 인간과 기계의 상호 관계에 대한 수험생의 견해를 요구했다. 서강대는 인간의 정체성을 다룬 지문을 제시하고, 정보통신 및 의학기술의 발달로 개인이 다양한 ID(정체성)를 보유할 수 있게 된 현실 속에서 인간 정체성과 관련해 제기될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할 것을 요구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로봇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인간을 위협하는 장면이 아니라 살인 혐의를 받고 쫓기는 써니가 스프너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난 누구죠?’(What am I? - 써니는 인간 Someone이 아닌 Something이므로 Who가 아닌 What이라고 묻는다)라고 묻는 장면이었다. 인간이 아닌 로봇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것이다. 이 장면이 유난히 관심을 끄는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써니의 얼굴에 인간의 얼굴이 오버랩되기 때문이었다.

현재 인체공학기술의 발달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인간의 신체와 결합한 인공 시·청각장치, 인공관절, 인공팔과 다리, 인공장기. 이들 모두는 인간의 신체와 결합하거나 그 속에 삽입되어 인간의 원활한 신체활동을 돕는다. 과학자들은 앞으로 20~30년 안에 인간의 대부분 장기를 인공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심지어 영혼을 복사(Back-up)한 후 신체만 바꾸어 불멸에 이르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만약 인간의 모든 신체가 기계(또는 그와 유사한 인공물)로 대체된다면 그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영혼만 살아 있다면 그는 여전히 ‘그’일 수 있을까? 혹시 그는 써니처럼 ‘Who am I?’가 아니라 ‘What am I?’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정체성에 관한 전통적인 믿음 중 하나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인 정신(영혼)과 육체의 공고한 결합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정체성은 육체와 정신의 변증법적 통일이라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정체성은 육체와 정신의 특징을 통해 형성되고 표현된다는 데 동의한다. 여기에는 육체와 정신은 성장·변화하지만 고유한 개체이며, 그 둘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믿음이 전제된다. 가령 일곱 살 때 화상(火傷)으로 생긴 얼굴의 흉터와 그에 대한 기억은 박 아무개라는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형성하는 요소다. 그런데 성형수술을 통해 이 흉터를 말끔히 없애거나 화상의 기억을 깨끗이 지운다면 ‘나’는 여전히 박 아무개일 수 있을까? 단순히 성형을 넘어 ‘나’의 팔, 다리, 내장기관, 심지어 뇌까지 인공물로 대체할 수 있다면 ‘나’의 정체성은 온전할 수 있을까?

흔들리는 정체성

만약 당신이 당신의 모든 장기(臟器)와 수족(手足)을 기계와 같은 인공물로 바꾼다면 정체성의 주요 속성인 개별성과 독립성은 사라진다. 즉, 인공물로 대체된 당신의 육체-육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면-는 더 이상 고유한 개체가 아니다. 영화에서 스프너 형사는 자신의 팔과 가슴의 일부분을 기계로 대체한 인물이다. 혹시 그가 로봇을 혐오하는 이유가 자신의 신체 일부가 기계로 대체되어감에 따라 자신이 인간인지, 기계인지 헷갈리는 정체성의 혼란에서 오는 거부감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볼 만하다. 그리고 같은 고민을 머지않은 미래에 많은 인간들이 공유하게 될지 모른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정체성을 구성하는 두 요소인 육체와 정신이 분리될 수 있음에 따라 기존의 정체성 개념도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속화해 인간의 신체가 기계로 대체된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스프너처럼 기계(로봇)를 혐오할까? 아니면 19세기 영국인처럼 기계를 쳐부수는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라도 벌일까? 어떤 형태로든 기계와 인간의 ‘결합’에 대한 비판과 거부는 생겨날 것이고, 개인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겠지만 그것이 그리 강력하고 오래 지속되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20세기에 발명된 ‘눈에 넣을 수 있는 안경’인 콘택트렌즈를 생각해보자. 콘택트렌즈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안구에 투명한 플라스틱 조각을 넣는 데 대한 약간의 이물감은 있을지언정 거부감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콘택트렌즈는 시력을 바로잡는 도구라고 생각할 뿐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심지어 예쁘게 보이기 위해 ‘서클렌즈’를 착용하는 사람도 있다). 보청기나 임플란트 치아 역시 인간의 신체적 결함을 보완하는 도구로 널리 사용된다. 시력 보정을 넘어 시각장애인을 위한 인공시각장치나 청각장애인을 위한 인공와우장치는 어떤가? 이것들을 더 정교화된 콘택트렌즈나 보청기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인간의 육체가 기계에 의해 대체 가능하다면 그의 고유한 정체성을 담보하는 건 정신 -볼테르는 ‘철학사전’에서 인간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동일성에 대한 ‘기억’이라고 주장했다- 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인간의 정신(영혼)을 백업할 수 있는 기술이 가능하다면 그 정신을 조작하는 기술 역시 가능할 것이다. 최면이나 암시, 세뇌 같은 정신조작 기술이 이미 오래전부터 발달해왔다는 걸 생각할 때, 어쩌면 육체를 기계로 대체하는 기술보다 정신을 조작하는 것이 더 쉬울지 모른다. 기능이 저하된 장기를 인공장기로 바꾸듯 누군가 당신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기억을 입력한다면, 당신은 여전히 ‘당신’일 수 있는가라는 정체성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신체의 일부를 기계나 다른 인공물로 바꾸는 것보다 기억이나 정신을 삭제, 삽입하여 왜곡하는 것이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에는 더 큰 위협일 수 있다. 결국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인간의 정체성은 혼란스러운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조작 가능성이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인 인간의 정체성을 소멸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체성이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자기인식을 바탕으로 스스로 규정하고 확립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 근거다.

과연 미래사회의 인간의 정체성이 어떤 식으로 규정될지, 어떻게 변화할지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변화된 현실 앞에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고민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 로봇’과 함께 볼만한 영화로 ‘공각기동대’ ‘이노센스’를 추천한다.



주간동아 565호 (p95~97)

박진성 엘림에듀 논술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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