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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삶|도림선원 원장 도현

藝와 禪에 바친 청춘 ‘서울의 新풍류객’

  • 한상진 기자 greenfish@donga.com

藝와 禪에 바친 청춘 ‘서울의 新풍류객’

藝와 禪에 바친 청춘 ‘서울의 新풍류객’

대금 연주도, 수행도, 운동도 모두 나를 열고 세상을 보듬기 위한 ‘심법(心法)’이다.

사람 냄새가 난다. 아니, 진동을 한다. 말끝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행복’이고 ‘즐겁게 잘 사는’ 방법이다. 그는 좋게 말하면 ‘한량’이요, 굳이 직업으로 표현하자면 ‘수행가’도 되고 ‘명상가’도 되는 그런 사람이다.

신문로에 위치한 자그마한 산방(山房)인 도림선원을 찾았을 때 ‘신풍류 전도사’ 도현(道玄·42)은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배운 지 4년이 넘었다는 거문고 소리는 거친 듯 부드럽게 초가을 오후의 고즈넉함을 한 움큼 담고 있는 산방의 구석구석을 골고루 채웠다.

거문고에 지치자 대금을 꺼내 불었다. 그리고 서예를 연습했고 그림도 그렸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자랑하기 위한 것도 아닌 자신만의 수련이니 시간에 쫓길 일도, 잘해야겠다는 긴장감도 없다. 그는 그저 글을 쓰는 붓 속에, 대금을 연주하는 손가락 마디마디에 ‘나를 담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藝와 禪에 바친 청춘 ‘서울의 新풍류객’
수행자 도현이 서울의 한복판인 신문로에 선원을 연 것은 올해 2월이다. 그러나 그와 신문로의 인연

은 10년을 훌쩍 넘겼다. 수행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던 90년대 초부터 그는 줄곧 신문로에서 수련했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의 수련생이자 친구이자 인생의 벗이 되고 있는 40여 명의 수행 동행자들을 만난 곳도 바로 신문로다.



예스러움이 물씬 묻어나는 산방의 내부 인테리어는 도현이 직접 꾸몄다. 경기도 이천, 여주, 저 멀리 전남 강진 등을 찾아다니며 하나씩 구한 옛 가옥의 대들보, 서까래, 문짝 등을 일일이 다듬고 서로 맞춰가며 아주 훌륭한 산방을 하나 만들어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만들어서 쓰고 필요하면 구해옵니다. 우리의 전통가옥 구조 방식은 짜맞추기식인데 그렇게 만드는 재주가 없어서 못질을 했죠. 그럴듯해 보이지만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선방을 다시 짓게 되면 열심히 공부해 전통적인 집짓기에 맞게 할 겁니다.”

藝와 禪에 바친 청춘 ‘서울의 新풍류객’
그의 이름(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신(道信)’이었다. 그에게 수행의 길을 가르쳐준 스승이 내려준 이름이다. 그러다 3, 4년 전부터 도현이라는 호를 새로 받았다. 속명은 일절 쓰지 않는다. 세상의 혼돈을 벗어나 수행자로, 학인(學人)으로 거듭난 자에게 속세의 이름이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일종의 진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공부가 쌓이고 수련의 깊이가 더해지면서 새로운 이름도 생긴 겁니다. 처음 받은 이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강등되는 경우도 있는데,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승진했으니 영광이죠”(웃음)라고 말했다.

끊임없는 수행의 삶 … 서예·그림·음악·무예 능한 팔방미인

직업이 ‘수행가’이지만 그는 못하는 것이 없는 만물박사로 더 유명하다. 산방을 직접 지은 것은 ‘놀이’ 정도에 불과하다. 그는 서예, 그림, 음악, 무예 등 모든 것에 능하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 모든 것이 수련의 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배운 적이 한 번도 없다. 붓글씨나 그림은 어린 시절 학원처럼 드나들었던 동네 서당에서 어깨 너머로 곁눈질했던 것이 전부. 초·중·고 미술시간에도 배우긴 했지만 입시생이 다 그랬듯, 그에게도 공부가 될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서예와 그림 솜씨는 예사롭지 않다.

제대로 교육받은 것이 있긴 하다. 그가 가장 아끼는 대금이 바로 그것이다. 대금은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3대 명인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 원장현 선생에게 사사했다. 90년대 초반인가. 우연히 듣게 된 원 선생의 대금 소리에 매료되어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됐고, 벌써 10년 넘게 대금을 불고 있다.

풍류를 알고 수행하는 사람답게 그는 아무 곳에서나 대금을 잡지 않는다. 그가 대금을 부는 곳은 정해져 있다. 서울의 한복판에 자리한 경희궁 뒷산 산책로가 바로 그곳이다. 그는 그곳에서 도시의 풍광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대금을 불고, 대금 소리를 들으며 명상에 잠긴다. 그의 대금 소리를 듣다 보면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린다. 도현은 오늘도 그 ‘기막힌’ 장소를 찾아 소리로 세상을 보듬고 있다.

시쳇말로 그는 좋은 학벌을 가지고 있다. 서울대 철학과 82학번. 지지리도 못사는 집에서 자랐지만 머리 하나는 쓸 만했다. 하지만 속세를 등지고 수행자로 사는 그에게 과거는 부질없는 일일 뿐이다. ‘황토산인’ ‘자연인’ ‘수련인’이 정확한 이름이자 직업이기 때문이다. 서울대를 나왔다거나, 도림선원의 원장이라는 등의 수식어를 붙이는 것에 그는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의 개인사에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녹아 있다. 20년에 가까운 수행의 뿌리도 바로 그곳에 있다.

타계한 도현의 부친은 정치인이었다. 광복 이후 안 되는 일도 없고, 되는 일도 없던 시절의 정치인. 어쩌면 혼돈의 시대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자유당 시절 총재가 사형을 당했던 조봉암의 진보당을 이은 통합사회당에서 활동했다. 현재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인 김한길 의원의 부친 김철이 당수를 지낸 그 당에서 핵심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니, 그의 부친의 삶이 얼마나 신산했을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평생을 혁명가로, 정치인으로 살아온 부친이 가족에게 남긴 것은 굶주림뿐이었다. 도현은 “항상 배고팠고 뭐든지 부족한 시절이었습니다. 배고프지 않게 사는 게 인생의 목표였을 정도니까요”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렇게 살아온 부친은 도현이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79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형편이 너무 어려워 병원비를 내지 못해 장례도 못 치를 정도였다. 김철 전 당수가 ‘병원비를 꼭 갚겠다’는 각서를 병원에 써주고서야 그의 부친은 한 많은 세상을 등질 수 있었다.

藝와 禪에 바친 청춘 ‘서울의 新풍류객’
집안 살림이 어렵다 보니 그는 일찌감치 산업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서야 했다.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그는 공장으로 식당으로 막노동판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고생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부친이 남긴 어마어마한 빚은 줄어들 기미가 없었고, 생활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마음속의 짐도 가벼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도현은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던 중 그가 만난 것이 바로 80년대 후반 대한민국을 강타한 소설 ‘단’이었다. 그 후 그에게 수련은 탈출구가 되었다. 행복이 뭔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그는 시간만 나면 산에 올랐고 기공을 수련했으며 바위에 걸터앉거나 나무 밑에 앉아서 명상에 잠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가 가르치는 수련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잘~ 살자’다. 생활이 됐든 수련이 됐든, 사람의 모든 삶이 ‘잘 살기 위한 투쟁’이라는 것이 도현의 한결같은 생각이다. 그가 수련생들에게 언제나 주문하고 강조하는 “얼짱, 몸짱, 현실짱이 되자”는 말도 결국은 ‘잘 살자’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정신을 맑게 해 표정을 바꾸고 얼굴을 바꾸는 ‘얼굴짱’, 행복의 기본이 되는 건강을 찾고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요가로 몸을 부드럽게 하고 선(禪) 수행을 통해 몸을 가꾸는 ‘몸짱’, 그렇게 건강해진 몸과 마음으로 현실에서도 항상 행복을 찾는 사람이 되자는 의미의 ‘현실짱’이 그것이다.

“수련은 한마디로 내면의 나를 성형하는 과정입니다. 돈도 안 들이고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죠. 얼굴에 칼을 대는 성형은 중독이 되면 불행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내면의 나를 성형하는 일은 중독이 될수록 더욱 많은 행복이 찾아오죠.”

그저 ‘바람 따라 물 따라’ 가는 사람인 그에게는 아주 독특한 취미가 하나 있다. 1300cc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을 가르는 것. 이곳저곳을 직접 튜닝한 그의 애마는 어지간한 자가용보다 비싼 데다 국내에 단 하나뿐이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개량 한복을 벗고 짙은 선글라스에 호랑이와 독수리가 날아다니는, 언뜻 보면 껄렁하기 이를 데 없는 ‘바이크복’을 갖춰 입은 수행자. 그에게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 오토바이를 왜 타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바람을 가르는 행복을 갖고 싶어서요. 세상을 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마치 바이크 위에서 느껴지는 거센 바람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바이크 위에서 꿈을 꿉니다. 날아가는 꿈. 바람을 가르고 이겨내는 꿈인데, 그건 세상의 고통을 모두 이겨내는 그런 느낌입니다.”



주간동아 558호 (p64~65)

한상진 기자 greenfi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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