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1

2006.09.05

내 기억들은 어디로 간 걸까?

주간동아·한국뇌학회 공동기획

  • 입력2006-09-04 12: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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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기억들은 어디로 간 걸까?

    영화 ‘메멘토’의 한 장면.

    뇌의 놀라운 능력 가운데 하나가 기억이다. 기억이 없다면 부모도 몰라볼 것이고, 집을 찾을 수도 없을 것이다.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는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 중요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다. 심지어 습득한 정보를 자기 몸에 문신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오래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해주는 요소다. 기억에 의해 인류 문화유산이 창달됐으며, 인간 정체성의 근본에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서술정보와 비서술정보

    우리가 배워서 기억하는 것들은 크게 서술정보와 비서술정보로 나뉜다. 서술정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정보다. 즉 학교 공부, 영화 줄거리, 장소 및 위치, 사람 얼굴처럼 사실이나 사건 같은 정보로서 외현정보라고도 한다. 반면 비서술정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보다. 여기엔 몸으로 체득하는 운동 기술, 습관, 버릇, 반사적 행동 등이 포함되며 감춰져 있다는 의미에서 암묵정보라고도 한다.

    서술정보는 비교적 쉽게 획득되지만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만 기억이 가능하며, 회상할 때 기억 내용이 변형되는 경우도 많다. 반면 비서술정보는 때로 고된 반복적 훈련을 통해서 얻어지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기억이 가능하며, 회상할 때 기억 내용이 정확히 표현된다. 운동선수의 운동 능력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사고로 인해 뇌가 손상된 뒤 심한 간질을 앓던 한 캐나다인은 뇌의 양쪽 측면인 내측두엽을 절개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그의 지능지수(IQ)는 수술 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금방 보거나 들은 내용을 수 분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새로 이사 간 집을 찾지 못하고 수술 전의 옛집만 기억했다.

    그러나 수술 후 처음 배운 테니스는 제법 실력이 향상됐다. 비록 누가 언제 어떻게 가르쳐줬는지, 심지어 자기가 배운 적이 있는지조차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나 그는 테니스를 잘 쳤다. 즉, 테니스 기술 같은 비서술정보 기억은 오래 유지되지만, 이사 간 집의 주소 같은 서술정보 기억은 오래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환자의 뇌에서 절개한 내측두엽에는 해마와 그 주변 조직들이 포함돼 있었다.

    또 다른 이는 교통사고를 당해 해마 부위가 손상된 뒤 서술정보 기억 능력이 심각하게 손상됐다. 해마는 서술정보 기억을 처리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 말한 두 사람은 수술 전 또는 교통사고 이전의 오래된 기억을 회상해냈다. 해마가 장기기억을 저장하는 장소는 아닌 것이다.

    장기기억 정보 용량은 무제한

    그렇다면 오랫동안 기억할 내용이 저장되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대뇌피질이다. 내측두엽으로 들어온 서술정보는 해마와 그 주변 조직들에서 몇 주 동안 일시적으로 머무는 동안 쪼개져 신경정보신호로 바뀌고, 어떻게 나뉘어 저장될 것인지가 결정된다. 오래 기억될 수 있도록 서술정보를 조직화하는 이 과정을 암호화 단계라고 한다.

    내 기억들은 어디로 간 걸까?

    알코올의존증으로 인한 뇌조직의 손상은 기억상실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의욕적인 학습 자세는 이 과정을 수월하게 해준다. 기존에 저장된 정보와 새로 저장될 정보가 유사한 경우 쉽게 연결되므로 암호화가 더 잘 일어난다. 내측두엽은 대뇌피질의 광범위한 영역과 신경망을 통해 연결돼 있어 이 같은 단기기억 정보를 대뇌피질의 여러 부위로 전달한다.

    이렇게 정보가 분산 저장되는 과정은 수면 중에 활발히 일어난다는 학설도 있다. 우리가 수면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낮 동안 받아들인 방대한 정보를 정리하고 저장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정보는 대뇌피질에서 같은 범주로 분류되는 내용끼리 같은 영역에 저장된다. 예를 들어 동물에 대한 정보와 무생물에 대한 정보가 저장되는 장소가 다르며, 동사와 명사가 저장되는 장소가 다르다.

    다음 단계에서는 기억과 관련된 유전자가 발현돼 단백질이 만들어지면서 기억 내용이 공고해져 오랫동안 저장된 상태를 유지한다. 기억을 회상해내는 일은 뇌 여기저기에 흩어져 저장돼 있는 정보들을 끄집어내 다시 짜맞춘 뒤 원래의 내용으로 복원하는 것이다. 뇌가 저장할 수 있는 장기기억 정보의 용량은 거의 무제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대화를 나누거나 어떤 일을 생각할 때 순간적으로 잠시 저장되는 내용은 용량에 제한이 있어 곧바로 지워진다. 이런 기억을 작업기억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114에 문의해 알아낸 전화번호는 전화를 걸기 전까지 잠시 잊지 말아야 한다. 이때 일시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전화번호 숫자는 7자리 정도다. 이 일은 뇌의 전두엽에 있는 신경세포(뉴런)가 담당한다. 이들은 작업기억 정보가 들어온 뒤 분비된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또는 글루타메이트에 반응해 정보의 내용을 저장한다.

    그러면 의식 밖의 기억은 어디에 저장될까? 서술정보 기억과 달리 비서술정보 기억은 운동 기술의 숙련과정, 계속적인 자극에 둔감해지는 습관화, 이와 반대로 한 번 자극을 받은 뒤 그와 비슷한 자극에 계속 반응하는 민감화처럼 의식이 관여하지 않는 기억이다. 조건화 학습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개가 종소리만 들리면 침을 흘렸던 러시아 과학자 이반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화는 종소리라는 청각 정보와 음식이라는 자극이 학습을 통해 연계된 결과다.

    또한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손다이크 교수는 보상에 대한 반응과 자극이 연계되는 조작적 조건화라는 학습 형태를 처음 시도했다. 실험상자 속의 쥐가 페달을 밟을 때마다 음식이 나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뒤 페달을 밟아 음식을 찾아 먹는 법을 익힌 것이다. 이 같은 조건화 학습은 서로 다른 뇌 신경망이 연합돼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페달을 밟는 것 같은 기술은 선상체나 소뇌에 저장되며, 습관화나 민감화 기억은 감각이나 운동체계를 관장하는 신경망에 저장된다고 알려져 있다. 비서술정보 기억 중 감정이나 보상작용 또는 공포와 관련된 기억은 편도체에 저장된다.

    뇌 건강 해치는 요인들

    내 기억들은 어디로 간 걸까?

    뇌혈류가 일시적으로 멈추면 일시적 기억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 환자의 뇌를 찍은 자기공명영상촬영(MRI) 사진을 보고 있는 의사들.

    기억은 쉽게 잊히기도 한다. 이는 정상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뇌의 이상으로 기억이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뇌중풍(뇌졸중), 치매, 알코올의존증, 병원성 감염, 물리적 충격 등으로 인해 뇌조직이 손상을 입으면 그럴 수 있다. 즉, 이런 요인들은 해마 및 그 주변 조직들을 손상시켜 기억상실증을 낳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옛날 기억보다 최근의 기억이 많이 손상된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기억 정보는 대뇌피질에 거의 영구적으로 보관되기 전 해마에 일시적으로 저장되는데, 뇌 손상은 이런 일시적으로 저장된 기억에 선택적으로 작용한다. 특히 일시적인 뇌경색이나 뇌 손상이 생겨 뇌혈류가 일시적으로 멈추면 일시적 기억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

    지사제 같은 약물을 복용해 일시적 기억장애가 일어난 예도 보고됐다. 파리를 일주일간 여행하던 한 미국 여학생이 마지막 날 지사제를 복용했는데, 집에 돌아온 뒤 여행 중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밖에 적조현상을 일으키는 미생물체에서 분비되는 신경 독소로 인해 기억상실증이 유발되기도 한다.

    반면에 오히려 잊어야 할 일을 잊지 못해 기억의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하면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 기억 저장에는 단백질 합성이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저장된 기억이 회상된 뒤 다시 제자리에 저장되기 위해서도 단백질 합성은 필요하다. 잊고 싶은 기억을 회상하는 순간 단백질 합성을 차단하면 기억을 영영 지울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우거나 보강하는 일이 먼 훗날의 일은 아닐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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