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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시네마천국|루이스 푸엔조의 '고래와 창녀'

상처받은 여자의 삶 죽거나 헤엄치거나

상처받은 여자의 삶 죽거나 헤엄치거나

상처받은 여자의 삶 죽거나 헤엄치거나
영화 ‘웨일 라이더’에서 뉴질랜드의 소녀는 고래 등을 타고 마을의 족장이 된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간장 선생’에서 창녀 소노코는 마침내 작살로 고래를 잡는다. 그러나 파타고니아 해변의 창녀는 끝끝내 고래와 눈을 맞추고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머리카락은 물 비늘의 요정이 되어 공기 속으로 기화하고, 목소리는 심해의 해초가 되어 흐물흐물 파도 속으로 풀어져 버렸다. 이제는 한 장의 사진으로만 남은 그녀. 반도네온을 허벅지에 걸친 나신의 모습으로. 1930년대 빛바랜 사진 속의 창녀 로라를 보고, 2003년에 살고 있는 작가 베라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지구 끝으로 가보기로 결심한다.

‘오피셜 스토리’와 ‘올드 그링고’를 내놓은 아르헨티나 감독 루이스 푸엔조가 오랜만에 신작을 선보였다. 루이스 푸엔조는 ‘오피셜 스토리’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고, 이 한 편으로 그는 전 세계에 코스타 가브라스 같은 사회 비판적인 영화감독으로 각인됐다. 그러나 실상 그의 작품은 누구 혹은 무엇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격정적인 인간상에 더 관심이 가 있는 편이다. 전작 ‘올드 그링고’에서 1910년 멕시코의 혁명전쟁을 항해했던 그가, 이번엔 1930년대 아르헨티나의 외딴섬 파타고니아로 날아간다.

다윈이 사랑했던 외딴섬 파타고니아가 무대

영어 제목은 ‘The Whore and the Whale’. 두운도 딱딱 맞는 ‘고래와 창녀’는 한 부박한 떠돌이 여자의 삶에 고래라는 이질적인 이미지를 포개놓으면서 독한 사랑의 향내를 지평선 너머까지 분출한다. 사진작가 에밀리오에게 반해 그를 따라 함께 파타고니아로 향했던 창녀 로라는 에밀리오가 눈먼 포주에게 자신을 팔아버리고 떠나려 하자, 다리 사이에 반짝이는 전구알을 끼고 마지막 탱고를 춘다. 담배연기 자욱한 파타고니아의 선술집에서 반도네온 소리에 맞춰 로라가 추는 ‘전구-탱고’는, ‘땅고’라 발음되는 이 관능적 춤이 사창가와 선술집의 비릿한 냄새 속에서 탄생했음을, 그리하여 마침내 ‘춤추는 슬픔 감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사연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 두 다리 사이의 전구는 로라의 영혼의 등대이자, 남자들을 그러모으는 관능의 신호등으로 반짝인다.

검은 고래는 영혼의 해방 선사하는 은유



불행하게도 이 여인의 마음을 꿰뚫은 사내는 에밀리오가 아니라 포주인 수와레즈였다 (‘여인의 향기’도 그렇고, 왜 여성과 탱고를 꿰뚫어 함께 보는 이들은 죄다 눈먼 사내들일까?). 포주와 동료 매춘부만이 절반의 이해와 절반의 화대를 함께 나누어 갖는 세상.

이 영화에서 ‘파타고니아’라는 생태학적 지도와 ‘탱고’라는 보형물은 주인공에 버금가게 중요한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이 ‘고래와 창녀’라는 이종 교합의 이미지를 영화에 끌어들인 것도 어쩌면 파타고니아를 찍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영화에서 파타고니아는 깊은 바닷속에서 하늘 끝까지 끝없는 깊이와 높이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찰스 다윈이 사랑했던 땅. 그리고 칠레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가 사랑했던 땅. 선데이 타임스의 브루스 채트윈은 ‘파타고니아’를 시인, 모험가, 망명가와 죄수, 즉 ‘고향을 등진 위대한 고질병자들’을 불러들인 땅이라고 했다. 파타고니아의 원시적 생명력, 비행기가 날고 고래가 밀려드는 해안의 깎아지른 듯한 아름다움은 바로 로라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자유와 열정의 지형도이기도 하다. 짧은 밤 2페소, 긴 밤 4페소. 목 안의 가시 같은 화대를 삼키며 하루를 넘기지만, 그녀의 거칠 것 없는 열정과 관능을 맛본 남자는 그녀를 잊지 못해 결국 파타고니아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토록 기다리던 남자가 돌아왔을 때, 여자는 이미 수많은 작살로 마음이 헤집인 채 깊은 심해로 가라앉고 있다.

상처받은 여자의 삶 죽거나 헤엄치거나
그러므로 수와레즈가 지적한 대로 ‘여자와 마찬가지로 정확히 누를 곳을 눌러야 소리가 나는’ 반도네온이 로라의 육체를 형상화한다면, 깊은 바다에서 불쑥 나타나 그 압도적인 힘과 크기로 사람들을 눌러버리는 검은 고래는 바로 로라와 베라에게 영혼의 해방을 선사하는 또 다른 은유이기도 하다.

유망한 소설가였지만 결혼과 함께 자신을 잃어버린 베라는 로라와는 정반대로 이제까지 심해에 가라앉은 채 살아왔다. 베라는 유방암 선고를 받고 이제 힘차게 수면 밖으로 나오고 싶어한다. 스페인이 아니라 굳이 아르헨티나까지 가서 가슴 한쪽을 도려내고, 그녀는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다. 베라는 말한다. 종양이란 도려내지 않으면 안에서 썩는 것이 문제라고. 그러므로 베라의 도려낸 가슴 한쪽은 오래전 인간들의 작살에 귀가 뚫린 고래의 상처와 공명하면서 결국 로라와 베라의 생을 이어준다.

구슬프고 절절한 탱고 음악 남미 영화 매력 발산

상처받은 여자의 삶 죽거나 헤엄치거나

파타고니아, 탱고, 반도네온 등 아르헨티나 '무드'로 가득 찬 '고래와 창녀'.
구슬픈 이국적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다.

흑백사진과 컬러 화면을 오가며, 운명적인 무드로 가득 찬 ‘고래와 창녀’는 ‘탱고’ ‘파타고니아’ ‘반도네온’ 등 지극히 아르헨티나적인 기호들로 치장된 이국적 팬터지의 자장에서 걸어 나온다. 페르난도 솔라나스의 영화 ‘탱고, 가드델의 망명’이나 카를로스 사우라의 ‘탱고’에 나오는 탱고 음악과 춤이 모두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상처와 연관되어 있는 것에 비해 푸엔조는 그러한 강박도 다 버린 듯하다. 더 비판적으로 영화를 보다 보면 좋았던 식민지 시절을 배경으로 어떤 역사적 자의식도 없이 유유하게 아프리카 창공을 날아다니던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시각적 스펙터클의 무책임함이 떠오르기도 한다.

특히 섬으로 향하는 창녀라는 지극히 진부한 스토리만은 미안한지, 제법 여성주의적 면모를 지닌 베라를 끌어들인 점도 작위적인 부분이 없지 않다. 마지막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문제. 낯선 언어의 벽은 영화를 섬세한 텍스트 읽기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만약 당신이 이 괴이한 번역을 넘어서 히스패닉의 세계에 대해 조금만 더 안다면, 예를 들면 카스티야와 카탈루냐가 어떻게 다른지 알고, 카탈루냐 방언을 이해한다면 (영화에서 베라는 카탈루냐 여자로 오해받는다), 물론 ‘고래와 창녀’는 더 많은 말을 해줄 것이다.

그럼에도 ‘고래와 창녀’는 구슬프고 절절하고 시적이며 이국적 향수를 자극하는 치명적인 매혹이 함께한다. 강렬한 마성을 가지고 있는 남미 영화의 매력은 알모도바르나 알렉스 이글레시아스 같은 스페인 감독들이 보여주는 역동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 결국 스페인 내전에서 죽어가는 에밀리오는, 이 바닷속에선 지상과 모든 것이 거꾸로이며 모든 것이 자유롭다고 말하지 않는가. 사진작가, 즉 예술가는 피사체를 착취했고, 착취당한 피사체인 창녀는 고래의 눈 속에서 자신의 눈을 본다. 이때 로라는 창녀가 아니라 마치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인어공주처럼 보인다. 창녀(the Whore)와 고래(the Whale). 그리고 루이스 푸엔조가 보여준 것은 명징한 이미지의 향연으로 가득 찬 남미 영화의 어떤 세계(the world)였다.



주간동아 544호 (p6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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