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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는 범죄 뒤엔 이유 있는 분노 있다

박근혜 피습사건 등 ‘무동기 범죄’ 잇따라 ... 학대·소외·빈부격차 등 응어리의 그릇된 표 출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이유 없는 범죄 뒤엔 이유 있는 분노 있다

이유 없는 범죄 뒤엔 이유 있는 분노 있다

최근 벌어진 박근혜 피습사건의 지충호 씨.

결국 ‘정치적 배후’는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5월31일 검찰은 ‘박근혜 피습사건’을 지충호(50) 씨의 단독범행으로 보고, 지 씨를 살인미수 및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20대 후반에 처음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이후 18년간 옥살이를 했던 지 씨는 또다시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면 지 씨는 왜 지긋지긋한 감옥행으로 이어질 게 뻔한 데도 수백 명의 인파 앞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해를 가한 것일까.

지충호 씨는 정신이상자가 아니다. 그는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사무실에 찾아가 선거유세 일정을 확인하고 커터칼을 준비했을 정도로 치밀하게 행동했다. 검찰도 지 씨를 정상인으로 보고 정신감정을 의뢰하지 않았다. 국선 변호를 맡은 김형국 변호사 또한 “지 씨는 왜곡된 영웅심리를 보이지 않는다. 박근혜 대표에게 미안해하고 있으며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범죄심리학자들은 지 씨의 범행을 전형적인 ‘무동기 범죄’라고 본다. 여기서 ‘무동기’란 동기가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범죄자와 범행 대상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없고, 앙갚음이나 금품 탈취 등 구체적인 범행동기가 없다는 뜻에서 무동기 범죄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는 동기는 ‘분노’에 있다. 분노는 가정불화, 아동학대, 차별대우, 소외, 빈부격차 등에 의해 싹트고 깊어진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범행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이러한 범행은 증오범죄, 화풀이범죄라고도 불린다. 경기대 이수정 교수(범죄심리학)는 “이러한 범죄자들은 여성, 부자, 정치인 등 구체적으로 미워하는 대상을 정해놓는다. 그러한 대상을 발견하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해를 가한다”고 말했다.



지충호 씨 오랜 보호감호 처분에 불만

하지만 ‘몰래’ 범행을 저지르는 범죄자들과 달리 지 씨는 공개된 장소에서 범행을 저질렀다. 그만큼 과감했다. 정신이상자가 아닌데도 그러한 행동이 가능한 걸까. 이에 대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강덕지 범죄심리과장은 “좋지 않은 결과가 예상됨에도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겉으로는 이득을 얻지 못한다 해도 범행을 통해 심리적 욕구, 감각적 만족을 얻게 됩니다. 지 씨 또한 범행을 통해 감정적 해소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유명 정치인에게 커터칼을 휘두를 정도로 지 씨를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빠뜨린 것은 지금은 폐지된 사회보호법으로 보인다. 지 씨는 검거 후 여러 차례 “억울하게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김형국 변호사도 “접견 내내 억울한 옥살이를 여러 차례 호소했다”고 전했다. 지 씨는 1991년 강도강간 혐의로 징역 7년에 7년의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다. 98년 징역형을 마치고 청송보호감호소에 수감됐다가 지난해 8월 가출소했다.

1980년에 제정된 사회보호법은 형을 마치고도 재판 없이 7년을 더 사회로부터 격리시킨다는 점에서 이중처벌, 과중처벌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여러 차례 청송감호소를 방문조사한 유시춘 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은 “그곳에서 지 씨처럼 절망과 분노에 빠진 사람을 수도 없이 만났다”면서 “원망, 적개심, 살의로 이글거리던 제소자들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무동기 범죄는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구체적인 수치는 나와 있지 않지만, 경찰 관계자들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해마다 크게 증가하고 있음을 체감한다”고 입을 모은다. 대검찰청이 발행하는 ‘범죄분석’지에서 간접적 통계를 확인할 수 있는데, 동기가 ‘우발적’인 범죄는 99년 8.9%에서 2004년 27.5%로 크게 상승했다. 범행동기로 ‘현실 불만’을 꼽은 범죄 또한 0.7%에서 0.9%로 높아졌다.

이유 없는 범죄 뒤엔 이유 있는 분노 있다

서남부 연쇄살인범 정남규 씨, 2003년 대구지하철 방화범 김대한 씨(왼쪽부터).

4월 검거된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사건의 진범 정남규(37) 씨 또한 무동기 범죄의 전형이다. 그는 서울 지역을 돌아다니며 안면 없는 여성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했다. 정 씨를 면담한 강덕지 과장은 정 씨가 수감생활 동안 겪었던 성폭행 경험에서 범행동기를 찾았다.

“수감생활을 하면서 동료 제소자들의 심한 구타와 성폭행에 시달렸는데, 그 일에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당한 고통 이상을 다른 사람에게 되돌려주려는 것이 인간의 심리지요.”

서울 응암동 자동차 파괴 사건(2005년 11월), 서울 구로구 여성 허벅지 교상 사건(2006년 1월), 북한산 방화 사건(2006년 4월) 등 최근에도 무동기 범죄가 여럿 일어났다. 주택가 골목에 주차된 20여 대의 자동차를 돌멩이로 파손시킨 정모(28) 씨는 “지갑을 잃어버려 기분이 나빴다”고 말했는데, 그는 전문대 졸업 후 취업을 하지 못한 청년실업자였다. 2시간 동안 22번이나 북한산에 불을 지른 강모(39) 씨는 부도로 공사비를 받지 못해 사회에 불만을 품었고, 아내까지 가출해 화가 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이처럼 무동기 범죄는 살인, 성폭행, 재물손괴, 방화 등 다양한 형태로 분출된다. 그중 최근 들어 가장 눈에 띄게 증가하는 것이 바로 방화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지난해 발생한 752건의 방화사건 중 방화 이유로 ‘사회에 대한 불만 해소’가 88건(11.7%)으로 가장 많았다. 경찰대 최규범 교수는 “방화는 가장 손쉬운 범죄”라고 지적했다. 인적만 드물다면 종이 한 장과 라이터만 있어도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에 관심 기울여야”

하지만 사회에 불만이 높다고 하여 모두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이 사회에 여러 불만을 가지고 있다. 범죄심리학자들은 ‘잘못된 귀인’을 하는 사람들이 쉽게 범행을 저지른다고 지적한다. 즉, 무동기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자기의 처지를 자기 탓이 아닌 남 탓, 사회 탓으로 돌리고 그 책임을 사회에 물으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한림대 조은경 교수(심리학)는 “지 씨는 큰일을 저질러 공개적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해 보인다”면서 “박근혜 대표가 아니었다면 다른 거물급 인사를 그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강덕지 과장은 “한국인, 특히 한국 남성은 외적 귀인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남성들은 어릴 때부터 ‘남자니까 그럴 수 있다’며 잘못을 용서받고 자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 과장은 “정치인들도 비리에 연루되면 잘못을 반성하기보다 ‘나만 재수없게 걸렸다’고 반응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나’도 범행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주는 무동기 범죄. 결국 이는 범죄자 개인의 특성 때문에 발생하기도 하지만, 경제적 양극화 등 사회가 그들에게 폭발시킬 수밖에 없는 분노를 심어주기 때문에 발생하기도 한다. 경찰대 박현호 교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이 범죄를 키운다”고 지적했다. 즉, 이들은 처음에는 사회적 무관심에 좌절하다가 나중에는 이 무관심으로 인해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지 씨는 18년 만에 사회 품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런 사회적 관심도, 감시도 받지 못했다. 다른 전과자들, 사회적 약자들도 지 씨와 같은 처지다.

영국의 저명한 경찰학자 마이크 맥과이어가 쓴 ‘Handbook of Crime Prevention and Community Safety’에 실린 범죄자들과 범죄심리학자의 인터뷰는 그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같은 전과자들은 지역주민들이 냉대하고 차별하고 소외시킬 때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생긴다. 일단 재범 의욕이 생기면 우리는 더욱 가려지고 숨겨진 존재로 남고 싶어진다. 범죄를 저지르기에 가장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주간동아 539호 (p36~38)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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