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1

2006.04.18

품질 훼손 ‘보졸레의 왕’의 추락

  • 입력2006-04-12 1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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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린 프랑스의 유명인 가운데 조르주 뒤뵈프라는 사람이 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독자들이 많을 테지만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이다. 그의 별명은 ‘보졸레의 왕(King of Beaujolais)’. 뛰어난 마케팅으로 보졸레 누보 축제를 세계적인 행사로 정착시킨 주인공이다.

    와인 산업을 애지중지하는 프랑스로선 고맙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4월4일 법정에 섰다. 와인 품질관리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좋은 포도와 나쁜 포도를 섞어서 30만 병에 이르는 프리미엄급 와인을 생산한 사실이 적발된 것. 2004년에 포도 수확이 좋지 않자 현장 관리 책임자가 생산량 유지를 위해 불법을 저지른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사건은 프랑스 와인 업계의 위기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불법을 자행하면서까지 품질을 훼손한다는 건 프랑스 와인 업계의 자존심을 내팽개치는 일이다. 자존심이 수익성 악화라는 현실 앞에 고개를 숙인 것이다.

    프랑스에선 와인 산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부쩍 높아졌다. 지난 20년 동안 프랑스의 와인 소비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2004년에는 프랑스인 10명 가운데 1명이 술을 끊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큰 문제는 젊은층의 소비가 급감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수출 시장에선 호주, 칠레, 스페인 같은 제3세계 와인의 공세에 점차 밀리고 있다.

    와인 생산업자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자 정부는 원인 분석과 함께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과잉생산이 문제이므로 포도나무를 일부 뽑아버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외국처럼 유통과정을 단순화하고, 수출 와인에 대해선 브랜드와 포도 품종만 앞세우자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빨간 트럭(Red Truck)’, ‘작은 펭귄(The Little Penguines)’이나 호주의 ‘노란 꼬리(Yellow Tail)’ 같은 이름은 기억하기 쉽지만 프랑스의 ‘샤토 드 네르베 브루이(Chateau de Nervers Brouilly)’ 같은 복잡한 이름을 외국인들이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겠는가 하는 얘기다. 한국을 예로 들더라도 프랑스 와인 가운데 지명도가 높은 것은 ‘샤토 탈보’나 ‘무통 카데’처럼 이름이 단순한 것들이다.

    지난달 프랑스 농업부가 내놓은 대책 보고서도 같은 맥락이다. ‘소비자를 위한 와인을 만들어야지 생산자가 꿈꾸는 와인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 보고서에는 비용 절감을 위해 와인의 향을 인위적으로 내는 것을 허용한다는 방침도 포함됐다. 와인을 숙성할 때 오크 톱밥을 넣어 향을 내도록 한다는 것. 지금까지는 품질 유지를 위해 오크통에서만 숙성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다른 나무통을 사용함으로써 비용을 줄이는 대신 향은 그대로 유지하려는 고육지책이다. 고급 와인 생산에만 치중하고 있는 보르도와 부르고뉴 지역을 향해 값이 싼 중급 와인을 더 많이 만들라는 주문도 나온다. 젊은 소비층을 위해 알코올 도수를 낮추자는 제안도 있다.

    한마디로 자존심을 포기해서라도 위기의 와인 산업을 구하자는 입장이다. 1000억원에 이르는 보조금을 추가로 투자할 계획인 프랑스 정부는 ‘와인 산업의 새로운 혁명’을 거론하면서까지 위기 탈출을 노리고 있다. 프랑스 와인 업계는 이제 ‘자존심’을 택할지 ‘밥그릇’을 택할지의 기로에 섰다.



    파리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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