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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줌업

“꼴려야 작품 찍고 목숨 걸고 연기한다”

‘취화선’에 온몸 내던진 ‘8개월 장승업’ … “지나친 칭찬 배우에게 독 될 수도”

  •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꼴려야 작품 찍고 목숨 걸고 연기한다”

“꼴려야 작품 찍고 목숨 걸고 연기한다”
”의미 있는 시간 되십쇼.” 그의 무대인사는 간결했다. 영화 ‘취화선’의 첫 공개 시사회가 열린 날 임권택 감독, 선배 배우 안성기 등과 함께 무대에 오른 최민식(40)은 그렇게 꾸벅 절을 하고 마이크를 넘겼다.

그러나 간결한 인사말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표정은 복잡다단했다. 뭔가 할 말이 가득한데, 딱히 뭐라 표현하기 힘든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가슴이 벅차서인지, 무언가가 불편해서인지 인터뷰를 위해 따로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도 그는 담배부터 찾았다. 그에게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난 소감부터 물었다.

“아쉬워요. 저야 영화를 객관적으로 볼 순 없죠. 촬영 당시엔 정말 최선을 다했고, 고민 끝에 결국은 맥시멈으로 표현해 냈다고 생각했는데, 완성된 걸 보면서는 ‘그때 왜 그랬을까, 저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할걸’ 하는 후회만 들어요. 어쩌겠어요. 사람이 완벽하지 않으니….”

목소리 크고, 남성적인 ‘박력’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는 이날따라 유독 지쳐 보였고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의 표정만큼 얼굴 주름도 더 깊어 보였다.

“꼴려야 작품 찍고 목숨 걸고 연기한다”
“전 이상하게 힘든 영화만 한 것 같아요. 이번에도 촬영 기간만 8개월이었는데, 총 106회 촬영 횟수 중 제가 출연한 분량이 103회쯤 됐으니 정말 8개월이 길게 느껴졌죠. 거의 혼자서 연기를 하다 보니 더 힘들게 느껴졌나 봐요.”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그의 연기 방식은 그에게 ‘환희’를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때론 지독한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가 ‘진저리쳐지는’ ‘살 떨리는’ 같은 수식어를 써가며 전달하는 그 느낌은 사실 연기를 하지 않는 입장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감독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인물에 대해 논리적·이론적인 분석을 마친 후 카메라 앞에 서지만, 일단 ‘큐’ 사인이 떨어지고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누구도 배우의 연기에 개입할 수 없고 도와줄 수도 없다. 그건 온전히 배우 몫이다. 최민식은 그 순간의 잔인함을 “어딘가에 확 내던져지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꼴려야 작품 찍고 목숨 걸고 연기한다”
조선 말 천재화가로 꼽히는 오원 장승업의 삶을 그린 영화 ‘취화선’을 통해 최민식은 장승업의 청년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적 성장과 방황을 그려간다. “감정의 완급 조절이나 화가로서 성장해 가는 과정, 내면의 번민이 쌓이고 충돌하는 과정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그는 토로했다.

“폐쇄적이고 답답한 사회에서, 끓어오르는 예술 의지와 자의식을 주체하지 못해 엄한 양반의 법도를 온몸으로 거스르며 야생마처럼, 들풀처럼 살다 간 인간”이라는 것이 최민식이 말하는 장승업이다. 그는 오원이 술과 여자에 빠져 살았던 기인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가의 자존심을 가슴 깊이 품고 살았던 ‘곤조’ 있는 인간이었고, 갓난아기처럼 순수한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모든 창작 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따른다. 이는 비단 화가에게만 국한된 건 아니다”는 그의 말처럼 과거의 인물 장승업과 그를 연기한 배우 최민식은 어쩌면 동일한 선상에 있는지 모른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화가라면 배우는 몸이라는 도구로 작업하는 예술가가 아닐까. 모든 배우에게 ‘예술가’라는 호칭을 붙이기 힘든 요즘이지만, 그에게는 이런 표현이 왠지 자연스러울 듯도 하다.

“꼴려야 작품 찍고 목숨 걸고 연기한다”
그러고 보니 주기 싫은 사람한테는 억만금을 준대도 그림 한 점 안 주고,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은 기생의 치마폭에는 하나 가득 매화를 쳐주던 장승업의 모습에서 인간 최민식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TV 쇼 프로그램에 나가 청중을 웃기거나 즉석 눈물연기를 선보이는 식의 ‘쇼맨십’에는 매우 허약하다. 그리고 개런티, 흥행수익 등 돈 계산 따위 이전에 ‘꼴려야만’ 작품을 한다는 사람이다. 계산할 줄 모르고,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진한 살 냄새를 맡는다. 최민식에 대해 ‘인간적인’ 혹은 ‘깊이 있는’ 배우라는 인상을 갖게 되는 건 가식이나 꾸밈과는 거리가 한참 먼 그의 이런 모습 때문이다.

“‘공동경비구역 JSA’나 ‘친구’ 같은 영화를 고사하면서 ‘파이란’을 택했을 때도 그 영화가 돈이 되리란 생각은 안 했어요. 시나리오를 읽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고, 주인공 ‘강재’가 나를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란 느낌이 확 오더군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파사모’ 같은 팬들을 만날 수 있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파사모’란 영화 ‘파이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 최민식은 이들과 돼지갈비집에서 만나 밤새 소주잔을 기울이며 영화와 인생을 논하는 친구가 됐다. 이들 중에는 군인도 있고, 직장인도 있고, 학생도 있고, ‘백수’도 있는데, 이들을 보면서 최민식은 처음으로 ‘팬의 존재가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꼴려야 작품 찍고 목숨 걸고 연기한다”
“어영부영 연기했다간 작살나겠구나, 이 친구들한테 ‘개 씹히듯’ 씹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들이 보여준 애정이 제겐 ‘최민식, 너 똑바로 해라’ ‘우리를 실망시키지 말아라’는 뜻으로 전해졌어요. 얼마 전엔 인터넷에 ‘취사모’가 결성됐다고 해서 들어가봤더니 그건 ‘취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이더군요. 하하.”

그와 대화하다 보면 술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 몇 해 전 그와 술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는 기자는 그의 술버릇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는 술자리에서 좌중을 압도하는 스타일인데, 사람마다 일일이 잔을 따라주며 술을 권하고 주는 대로 호기롭게 받아 마신다. 얼마 후 술자리가 조용해졌다 싶어 돌아보면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잠들어 있다. 급하게 마시고, 취하면 어디서나 곯아떨어지는 게 그의 술버릇이다. 송강호 설경구 등 이 시대 최고의 배우들이 모두 그의 다정한 술친구들이다.

“강호하고 경구하고 술 마시면서 그런 얘길 했어요. 우리는 늙어서도 폼 나게 연기하자고. 그런데 영화가, 연극이 배우 최민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때가 오면 미련 없이 떠날 겁니다. 내가 너무 사랑했고 소중하게 여겨온 배우의 삶을 구걸하고 싶진 않아요. 난 목숨 걸고 배우를 하는 사람이에요. 변호사 하면서 ‘취미’로 배우 한다는 TV 광고를 본 적이 있는데, 솔직히 죽여버리고 싶었어요.”

그는 이렇듯 거침없고 원색적이다. 애써 예쁜 말로 자신을 포장하거나 세련된 매너로 속내를 감추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비난할 사람은 없을 듯하다. 심하다 싶을 정도의 자기학대와 고통 속으로 자신을 기꺼이 던져 넣음으로써 그만의 독특한 연기세계를 완성해 왔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꼴려야 작품 찍고 목숨 걸고 연기한다”
최민식은 ‘쉬리’와 ‘해피엔드’를 거쳐 ‘파이란’에 이르러 절정의 연기를 선보였고 ‘우리 시대 최고의 배우’라는 찬사까지 들었다.

“최고의 배우라뇨? 전 그런 거 안 믿어요. 연기가 무슨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것도 아니고, 상 몇 개 탄다고 완성되는 건 아니잖아요. 어떻게 보면 배우에게 독이 될 수도 있는 소리예요. 내가 표현하지 못하는 걸 (송)강호나 (한)석규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이고…. 연기에 1, 2, 3등을 어떻게 매길 수 있겠어요?”

최민식은 오는 5월 칸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행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다(‘취화선’은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이 확정됐다).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하는 여행이 될 거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환해진다.

“만날 바가지 긁히는 모습만 보다가 그곳에서 빨간 카펫 밟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 남편이 좀 달라 보이지 않겠어요? 최소한 몇 년은 편하게 살 수 있겠지. 상이라도 하나 받으면 아주 난리가 날 텐데….”(웃음)



주간동아 333호 (p62~63)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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