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심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율곡 선생의 말처럼 사제 사이를 엄연히 잡은 다음 교육을 하면 마음가짐과 그 효율성 면에서 차이가 클 거라는 생각에 고개가 끄떡여집니다. 기자에게도 ‘사이를 잡는’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들고 날 때를 알고 의로운 길을 알려주시던, 참으로 ‘시계 같은 선생님’이었죠. 고락(苦樂)이 있을 때면 가장 먼저 연락드릴 정도로 가깝게 지낸 스승이지만 절로 몸가짐을 조심하게 되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배군, 기말고사는 쳐야지. 얼른 오시게.” 2000년 초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이었습니다. 졸업반이라 ‘취업’ 핑계를 대면 알아서 적당한 점수를 주는 ‘암묵적 관행’이 있던 때였지만, 선생님은 ‘끝까지’ 시험답안을 요구하셨습니다. 신문사에 들어가 군기 바짝 잡힌 채 며칠 다니고 있던 터라 학교에 간다는 건 엄두가 안 났죠. “회사 앞으로 시험지 들고 가겠다”는 선생님을 만류하고 어렵사리 짬을 내 연구실로 달려가 혼자 시험을 치렀습니다.
“성적 근거 자료가 필요해서 자넬 오라고 한 것은 아니네. 큰일 할 사람은 ‘남도 나와 같이, 겉도 속과 같이, 끝도 시작과 같아야’ 한다네.” 석양이 지는 연구실에서 얇은 담배 한 개비 물고 창밖을 바라보시던, 163cm 단구(短軀) 초로(初老) 신사의 뒷모습이 늘어진 그림자만큼 크게 느껴졌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밤에 은은한 향기를 뿜는 ‘야래향(夜來香)’ 같은 사람이 돼라”시던 결혼 주례사도 귀에 또렷합니다. 그때 기자는 주례 선생님께 으레 드린다는 상품권이나 현금봉투는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고마움을 평생 갚겠다는 작은 다짐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