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해 한국에서 살면서 나의 미래에 대해 희망보다는 절망감이 들었고, 내 아이를 한국의 교육제도에 맡기는 것이 싫어 미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월드컵 기간중 스스로 붉은 셔츠를 입고 거리에 나가 응원을 하면서 나는 벅찬 감동과 함께 한국도 더불어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미국에 돌아가면 아내와 진지하게 귀국 문제를 논의해 볼 생각이다.”
외국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한국에서 외국 이주를 계획하던 사람들도 ‘월드컵 충격’이 큰 건 마찬가지다. 지난해 미국 이민을 결심한 박모씨(31·회사원)는 일찌감치 미국 공인회계사 자격을 땄고, 외국인회사에 다니던 아내 이모씨(31)도 현지 본사로 전출을 신청하는 등 이주 계획을 착실히 준비했지만, 월드컵을 계기로 포기했다고 말한다. “아내와 거리응원을 하면서 놀라운 대표팀의 선전과 역동적이고 질서정연한 붉은 응원 인파 속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자긍심,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꼈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이민 이야기는 없었던 일로 하기로 결정했다.” 박씨의 아내 이씨도 “아이들 교육문제 등 미래를 고려할 때 이민이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월드컵으로 경험한 감동은 그간 이성적으로 생각해 왔던 이민의 이유들을 무력화해 버렸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 대표팀이 월드컵 사상 첫 4강 진출이라는 극적 감동을 보여준 뒤 외국에서의 새 터전을 꿈꾸던 이민 희망자들의 발길이 주춤해진 상태라고 한다. 최근 외교통상부 재외국민이주과에 따르면 6월 한 달간 해외이주 신고를 한 이민 희망자는 모두 828명으로, 평균 1000여명을 웃돈 다른 달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
해외 이주 알선업체의 상담 건수도 월드컵 기간중 상당히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한마음 이주공사의 김미현 대표는 “하루에 30건, 한 달에 900여건에 육박하던 상담 건수가 6월에는 30% 이상 줄었다”며 “월드컵 열기로 이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점도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한양이주공사의 강영덕 대표는 “이미 이민 절차를 밟고 있는 사람들은 월드컵 붐에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이민을 가려고 생각했거나 이민을 갈까 말까 망설이던 사람들 중에는 월드컵 성과가 이민 포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처럼 월드컵은 IMF 이후 한국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에게 조국을 다시 한번 보게 한 국민축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아마도 4강신화 창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길거리 응원의 역동성, 하나 됨의 경험, 성숙한 시민의식 등 월드컵의 긍정적 요소들이 그간 이민의 주된 이유로 꼽혔던 자녀교육 문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 부정적 생각들을 훌훌 털어냈기 때문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