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그 경계에 있는 어떤 모호한 세계다. 머리를 박박 깎고 얼굴에 회칠한 무용수들은 느리고 무거운 동작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 밀랍으로 만든 인형, 혹은 대리석 조각처럼 보인다. 입술까지 회칠이 된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다. 한 방울씩 물이 떨어지는 소리로 시작된 음악은 폐부를 찌르듯 음산하게 울린다.
‘부토’(舞蹈)라는 춤의 이름을 들어보았는가. 만약 이 춤을 직접 보았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장르를 막론하고 예술을 통해 죽음을 들여다보기란 쉽지 않다. 낭만적인 흥취로 다루어진 죽음이 아닌 진짜 죽음 말이다. 부토는 진정한 죽음의 세계를 보여준다. 임종을 맞은 사람이 몰아쉬는 마지막 숨, 혹은 일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시체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춤이 부토다. 원로 부토 무용가인 오노 가즈오는 “부토 무용수는 자신이 소우주의 중심이 되어 우주의 힘을 몸 속으로 끌어당긴다. 그러므로 부토는 곧 우주 자체”라고 말한 바 있다.
때문에 ‘무용’ 하면 으레 떠오르는 예쁘고 우아한 동작은 부토 속에서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무용수들은 얼굴과 온몸에 흰 칠을 하고 머리카락도 밀어버린다. 아예 나체가 되어 춤을 추기도 한다. 그 속에는 꾸밈도 과장도 없다. 극도로 느릿한 동작 속에는 오직 삶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만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은 괴기스럽고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부토를 보는 것은 때로 고통스럽다. 유럽에서 처음 부토가 공연되었을 때 적지 않은 유럽인들은 울면서 이 춤을 보았다고 한다.
부토는 1960년대를 전후해 일본에서 탄생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토는 상당히 일본적인 춤이다. 흰 칠을 한 얼굴은 가부키(歌舞伎)나 노(能) 같은 일본 전통 연희의 분장을 연상시킨다. 부토의 밑바닥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의 허무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 그것은 마치 전쟁의 잔해 같기도 하고 절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의 속울음 같기도 하다. 부토는 80년대에 유럽에 소개되어 극찬을 받았다. 파리에서는 ‘파리 오페라극장 티켓은 구할 수 있어도 부토 공연 티켓은 구할 수 없다’는 말도 생겨났다.
올해로 10회를 맞은 창무국제예술제는 부토 무용단인 ‘산카이 주쿠’를 초빙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 단체는 지난 95년의 내한공연에서 ‘경이롭게 서 있는 달걀’이라는 작품을 선보여 우리 무용계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이 공연한 ‘히비키-태고로부터의 울림’은 올해 2월 제26회 로렌스 올리비에상의 ‘새로운 댄스’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도 무대에 선 부토 무용수를 보는 것은 충격이다. 막이 열리면 가면 같은 얼굴의 무용수들이 자궁에 든 태아의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벌떡 일어선다. 비쩍 말라 더욱 길어 보이는 팔다리는 이미 사람의 몸이 아니다. 마치 줄을 당기는 듯한 동작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전진하다 양팔을 들고 웅크린다. 부토 특유의 절제된 동작들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삶과 죽음의 주제 ‘역동적 표현’
‘낙하’ ‘전이’ ‘빈 공간’ ‘빨강의 외적한계’ ‘연상’ ‘울림’의 여섯 장으로 구성된 산카이 주쿠 무용단의 부토는 7년 전의 공연보다 더 세련되고 조형화된 인상을 주었다. 대신 구토가 일어날 것 같은 그로테스크함은 많이 줄어들었다. 동작 역시 빠르고 다양해져서 지루한 느낌이 덜했다. 여섯 명의 무용수들은 1시간30분의 공연시간 내내 엄청난 긴장과 집중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끝없이 반복되는 단순한 동작, 춤이라기보다 제사의식의 일부 같은 동작들은 역시 관객에게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네 명의 무용수가 붉은 물이 담긴 유리판을 가운데 두고 선 채 피를 흘리는 듯한 의상을 입고 춤춘 ‘빨강의 외적한계’에 이어 한 명의 무용수가 춘 ‘연상’은 이번 공연의 백미였다. 그 속에는 부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정신세계가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 몸부림치는, 그러면서도 결국 한계가 뚜렷한 인간의 몸.
이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7월2, 3일에 호암아트홀을 찾은 관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회사원 이현경씨는 “슬로비디오를 보듯 정적인 동작 속에 삶과 죽음의 무거운 주제가 역동적으로 느껴져 너무나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미국인 제나 오스틴씨는 “기존의 부토에 비해 동작이 매우 아름답고 세련됐다”고 평했다.
관객의 박수갈채에 무용수들은 천천히 무대로 나와 부토 특유의 동작으로 인사했다. 두세 번 거듭된 커튼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토 무용수들은 항상 마지막 무대인사까지 춤 동작으로 마무리한다. 삶과 죽음이 끝나지 않는 순환의 고리이듯, 이들의 춤 역시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는다는 메시지리라.
‘부토’(舞蹈)라는 춤의 이름을 들어보았는가. 만약 이 춤을 직접 보았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장르를 막론하고 예술을 통해 죽음을 들여다보기란 쉽지 않다. 낭만적인 흥취로 다루어진 죽음이 아닌 진짜 죽음 말이다. 부토는 진정한 죽음의 세계를 보여준다. 임종을 맞은 사람이 몰아쉬는 마지막 숨, 혹은 일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시체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춤이 부토다. 원로 부토 무용가인 오노 가즈오는 “부토 무용수는 자신이 소우주의 중심이 되어 우주의 힘을 몸 속으로 끌어당긴다. 그러므로 부토는 곧 우주 자체”라고 말한 바 있다.
때문에 ‘무용’ 하면 으레 떠오르는 예쁘고 우아한 동작은 부토 속에서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무용수들은 얼굴과 온몸에 흰 칠을 하고 머리카락도 밀어버린다. 아예 나체가 되어 춤을 추기도 한다. 그 속에는 꾸밈도 과장도 없다. 극도로 느릿한 동작 속에는 오직 삶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만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은 괴기스럽고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부토를 보는 것은 때로 고통스럽다. 유럽에서 처음 부토가 공연되었을 때 적지 않은 유럽인들은 울면서 이 춤을 보았다고 한다.
부토는 1960년대를 전후해 일본에서 탄생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토는 상당히 일본적인 춤이다. 흰 칠을 한 얼굴은 가부키(歌舞伎)나 노(能) 같은 일본 전통 연희의 분장을 연상시킨다. 부토의 밑바닥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의 허무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 그것은 마치 전쟁의 잔해 같기도 하고 절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의 속울음 같기도 하다. 부토는 80년대에 유럽에 소개되어 극찬을 받았다. 파리에서는 ‘파리 오페라극장 티켓은 구할 수 있어도 부토 공연 티켓은 구할 수 없다’는 말도 생겨났다.
올해로 10회를 맞은 창무국제예술제는 부토 무용단인 ‘산카이 주쿠’를 초빙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 단체는 지난 95년의 내한공연에서 ‘경이롭게 서 있는 달걀’이라는 작품을 선보여 우리 무용계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이 공연한 ‘히비키-태고로부터의 울림’은 올해 2월 제26회 로렌스 올리비에상의 ‘새로운 댄스’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도 무대에 선 부토 무용수를 보는 것은 충격이다. 막이 열리면 가면 같은 얼굴의 무용수들이 자궁에 든 태아의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벌떡 일어선다. 비쩍 말라 더욱 길어 보이는 팔다리는 이미 사람의 몸이 아니다. 마치 줄을 당기는 듯한 동작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전진하다 양팔을 들고 웅크린다. 부토 특유의 절제된 동작들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삶과 죽음의 주제 ‘역동적 표현’
‘낙하’ ‘전이’ ‘빈 공간’ ‘빨강의 외적한계’ ‘연상’ ‘울림’의 여섯 장으로 구성된 산카이 주쿠 무용단의 부토는 7년 전의 공연보다 더 세련되고 조형화된 인상을 주었다. 대신 구토가 일어날 것 같은 그로테스크함은 많이 줄어들었다. 동작 역시 빠르고 다양해져서 지루한 느낌이 덜했다. 여섯 명의 무용수들은 1시간30분의 공연시간 내내 엄청난 긴장과 집중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끝없이 반복되는 단순한 동작, 춤이라기보다 제사의식의 일부 같은 동작들은 역시 관객에게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네 명의 무용수가 붉은 물이 담긴 유리판을 가운데 두고 선 채 피를 흘리는 듯한 의상을 입고 춤춘 ‘빨강의 외적한계’에 이어 한 명의 무용수가 춘 ‘연상’은 이번 공연의 백미였다. 그 속에는 부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정신세계가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 몸부림치는, 그러면서도 결국 한계가 뚜렷한 인간의 몸.
이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7월2, 3일에 호암아트홀을 찾은 관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회사원 이현경씨는 “슬로비디오를 보듯 정적인 동작 속에 삶과 죽음의 무거운 주제가 역동적으로 느껴져 너무나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미국인 제나 오스틴씨는 “기존의 부토에 비해 동작이 매우 아름답고 세련됐다”고 평했다.
관객의 박수갈채에 무용수들은 천천히 무대로 나와 부토 특유의 동작으로 인사했다. 두세 번 거듭된 커튼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토 무용수들은 항상 마지막 무대인사까지 춤 동작으로 마무리한다. 삶과 죽음이 끝나지 않는 순환의 고리이듯, 이들의 춤 역시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는다는 메시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