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러한 그의 주장에 걸맞게 새 천년 들어 첫번째로 열리는 이번 대회에서는 시작부터 새로운 시도들이 눈에 띈다. 도쿠멘타의 공식 일정이 시작되기 1년 전부터 이미 ‘플랫폼’이라 불리는 일련의 토론회가 베를린, 빈, 뉴델리, 산타루치아, 라고스 등 세계 각처에서 열렸다. 공개토론 외에도 영화 상영과 강연, 심포지엄 등으로 이루어진 이 모임들에서 사람들은 20세기의 비극, 특히 남미 혼혈족의 문제, 아프리카 국가들의 내전 등 현재의 지구촌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논의했다. 여기서 다루어진 내용들이 제5차 플랫폼이기도 한 도쿠멘타의 이름으로 카셀에서 시각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랫폼이란 탐구장치들은 단순히 ‘카셀 도쿠멘타라는 사건을 위한 예비작업’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이미 하나의 ‘사건’이었다.
세계 최대 규모로 5년마다 열려

그는 이번에 전시될 작품들을 예년과 달리 유럽과 미국 일변도로 선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출신지인 아프리카가 특별 취급을 받은 것도 아니다. 이러한 선정 작업을 두고 사람들은 ‘국제적(international)이라기보다는 초국가적(transnational)’이라고 평한다.
카셀 도쿠멘타에 초대된 작가들의 면면만 보아도 이런 특징은 확연히 드러난다. 118명의 초대작가 중 4분의 1 가량은 그들의 출신 국가를 떠나 타국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이다. 예컨대 파리 출신인 조각의 거장 루이즈 부르주아는 현재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고, 터키 출신 비디오아트 작가 쿠틀룩 아타만은 영국에서, 포르투갈 출신 멀티미디어 예술가 아르투르 바리오는 브라질에서 살고 있다. 역사적인 소재들로 비디오 작품을 구성한 인도네시아의 작가 피오네 탄은 네덜란드에 거주하며, 멕시코 출신의 설치예술가 가브리엘 오로스코와 이란의 사진작가 겸 비디오아트 작가인 쉬린 네샤트 역시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다. 초대작가의 4분의 1 가량이 60세 전후의 중견작가들이라는 것도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올해 91세로 참가자 중 현역 최고령 작가인 루이즈 부르주아는 유명한 ‘감옥’ 시리즈 중 4점을 내놓았다. 철조망으로 만든 갑갑한 느낌을 주는 새장, 그 안에 놓인 축 늘어진 인형들, 목이 잘리고 목 졸려 죽임당한 머리들 등은 인간 현존의 무게를 상징한다. 부르주아 못지않게 미술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꼽히는 프랑스인 안네트 메사제의 작품도 흥미롭다. 그의 전시장에는 기묘한 인상을 주는 인형극장이 천장 아래 매달려 있다. 교미하는 테디베어들과 빌로드 천으로 만든 해골들과 함께 말이다. 그 밖에도 온 카와라, 제임스 콜먼, 이사 겐즈켄, 후앙 뮤노스, 에케 봉크 등 중견작가들의 작품들은 이 전시회의 무게를 한층 더해준다.

1955년 아널드 보데가 주관한 제1회 도쿠멘타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회의 초점은 사라져가는 식민주의에 맞추어져 있다. 새로운 유토피아, 진정한 민주적 사회의 기초는 낡은 식민주의적 발상을 버릴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제11회 카셀 도쿠멘타는 유난히 정치적인 동시에 사회 참여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리투아니아의 부부 미술가 노메다 우르보나스와 게디미나스 우르보나스는 어떤 신문에 실린 정신과 의사의 기사를 실마리로 삼아 발틱 사회의 여성상을 분석하고 있다. 덴마크의 미술가는 가로등에 베트남제 전구를 끼워 넣으려 한다. 구동독 지역에 살다가 세상이 바뀐 이후 영주권을 잃어버린 베트남인들을 연상시키기 위해서다. 어떤 컴퓨터게임 예술가는 도쿠멘타 관람객들로 하여금 사격 표적 대신 자기 자신, 폭력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총을 쏘도록 만든다. 독일의 작은 도시 카셀에서 열리고 있는 제11회 도쿠멘타는 예술이 이 세상에 현존하는 모든 재앙과 고통들을 반영하는 작업이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