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화는 90년대 중반, 자신의 마케팅 포인트를 청순함에서 섹시함으로 바꿨다. 주로 뮤직비디오와 방송의 쇼 프로그램을 통해 형성된 그녀의 섹시 코드는 그러나 여가수들이 흔히 그렇듯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시대 여성들에게 더 호소력 있게 전달됐다. 이것이 바로 엄정화만의 특별한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섹시하지만 천박하지 않고, 요염하지만 도발적이지 않았다. ‘초대’ ‘페스티발’ ‘배반의 장미’ ‘마지막 유혹’ 등 그녀가 뮤직비디오를 통해 전파한 섹시 코드는 남성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도발적 유혹이라기보다는 숨어 있는 매력으로 남성들을 빨아들이는 은근한 섹시함이었다.
엄정화의 노래가 또래 여성들의 노래방 애창곡 상위 순번으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그녀들에게 엄정화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섹시 코드를 발산하는 여자 연예인들의 상당수가 같은 여성들로부터는 질투심을 유발시키는 데 비해, 엄정화의 친근한 매력은 그녀를 따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즉, 엄정화의 가장 큰 지지자들은 그녀를 자신의 역할모델로 설정한 후배 여성 계층이다.
MP3 플레이어의 보급 등으로 가요시장이 침체되자 엄정화는 ‘마누라 죽이기’(1994년) 이후 8년 만에 다시 연기자로 방향을 돌린다. 엄정화는 자신의 영화 데뷔작을 만들었던 유하 감독의 두 번째 작품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년)에서 안정된 직장과 경제적 조건을 갖춘 남자와 결혼한 뒤에도 여전히 예전 남자친구를 만나는, ‘연애 따로 결혼 따로’의 사고방식을 가진 연희라는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주었다. 엄정화는 이 영화로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2003년)에서는 김주혁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조화를 이루면서 새침한 모습으로 연기 폭을 확장했다. 또 결혼 안 한 30대 남녀들의 이야기 ‘싱글즈’(2003년)에서는 동미라는 캐릭터를 통해 쿨한 여성상을 보여주었고, ‘오로라 공주’(2005년)를 거쳐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년)과 최근의 ‘호로비츠를 위하여’(2006년)까지 그녀는 자신의 도회적 이미지를 조금씩 변주하면서 연기 영역의 확대를 꾀하고 있다.
천민자본주의라고 비판받던 압구정동을 무대로 산업사회의 물신화 풍조를 비판한 시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유하 시인 자신이 영화화한 작품을 시작으로 엄정화는 최근작까지 거의 비슷한 캐릭터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주로 산업사회의 도시적 미를 가진 여성으로 등장했다. 엄정화가 출연한 영화 가운데 대박 영화는 거의 없다. 하지만 크게 흥행에 실패한 영화도 없다. 이것은 그녀가 빅스타급은 아니지만 적극적인 지지자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호로비츠를 위하여’
일찍이 엄정화는 소녀가장이었다. 과거형을 쓴 것은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다. ‘쾌걸춘향’ ‘부활’ 등의 TV 드라마를 통해 차세대 연기자로 떠오른 동생 엄태웅은,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 연상의 여인 고두심과 커플로 등장하여 닭살 연기를 보여주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막내 동생이라 애 같기도 하지만 가끔 나보다 더 어른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며칠 전 동생에게서 문자가 왔는데, ‘이젠 내가 지켜줄 테니까 힘들면 내색도 좀 하라’는 내용이었다. 동생이 백상예술대상 최우수남자연기상과 인기상 후보에 올라서 무척 대견스럽다.”
부친인 고 엄진옥 씨는 그녀가 6살 때 세상을 떠났다. 너무 어렸을 때여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아버지가 서라벌 예대 재학시절 연기를 전공해 많은 연극무대에 섰던 촉망받는 배우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엄정화의 아버지는 졸업 후 교직을 택해 전문 배우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엄정화, 엄태웅 남매의 연기 뒤에는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있는 셈이다.
엄정화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송사 합창단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힘들게 가수로 데뷔한 뒤 영화를 찍기도 했지만 연예계 생활의 대부분을 가수로서 활동했다. 연기로 방향을 전환할 때 그녀는 심사숙고했지만 가족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모습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연기를 하면서도 아버지가 배우였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려울 때마다 아버지에 대한 묘한 향수와 존경심이 나를 바로 세워줬다.”
피아노 신동과의 계산된 만남 … 그러나 인간적 결말
엄정화는 최근 일본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엄정화의 일본 팬클럽은 ‘템테이션’. 그녀가 부른 노래 제목에서 이름을 따온 이 모임은 회원 수는 많지 않지만 열성적으로 엄정화를 응원하고 있다. 일본 위성채널 소넷을 통해 엄정화가 출연한 TV 드라마 ‘12월의 열대야’가 방영되면서 일본 내 엄정화의 지명도가 높아지고 있다. 앞으로 엄정화는 모델, 가수, 연기자로서 일본 시장을 노크할 계획이다.
‘호로비츠를 위하여’를 제작한 사이더스FN의 김미희 공동대표는 엄정화에게 “내 욕심인데, 정화 씨. 시집가지 말고 연기만 했음 좋겠어. 그래도 결혼을 한다면 이미숙 선배처럼 활동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30대 중반을 넘어선 여자 연기자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엄정화는 욕심 부리지 않고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유학 대신 변두리 동네에 피아노 교습학원을 연 김지수(엄정화 분)가 악동 경민(신의재 분)을 만나면서 겪는 이야기다. 경민이 피아노에 천부적 재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지수는, 경민을 열심히 지도해 피아노 콩쿨대회에서 입상시켜 학원 홍보에 도움을 받으려는 얄팍한 속셈으로 경민을 지도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경민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갖게 되고 마음의 벽을 허물면서 가까워진다는 이야기다.
‘호로비츠를 위하여’
엄정화가 사랑받는 이유도 이런 것이다. 그녀는 과욕을 부리지 않았고 항상 현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고방식은 항상 기분 좋은 미소를 띠게 만든다.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 대역을 써도 되는 피아노 연주 장면을 굳이 직접 시도한 것만 봐도 그렇다.
“처음에는 내가 직접 연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직접 연주해야 한다면 손가락이 굳어서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다. 그러다 마음을 굳히고 연습을 시작했다. ‘연습해두면 나한테 나쁠 것 없다, 잘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연습을 하면서 점점 빠져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시작해 영악한 다른 아역배우들과는 달리, 꼬마 피아니스트로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는 경민 역의 신의재 군과 친해지는 과정은 영화 속 장면과 흡사했다. 내성적이고 돌발행동을 자주 하던 신 군은 나중에는 친조카처럼 엄정화와 가까워졌다.
엄정화의 다음 작품은 ‘미스터 로빈’. 국제 비즈니스맨인 직장 상사 다니엘 헤니를 유혹하는 이야기다. 작품을 고르는 안목도 괜찮고 자신의 배역을 기대 이상으로 표현하며 성장해온 엄정화가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이 작품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