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딸을 둔 학부모 지모 씨는 최근 딸 재원이가 TV나 책을 보다가 자주 ‘황당한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장면이 나오면 “엄마가 밥그릇을 아이에게 던지면 얼굴에 퍽 맞고, 자식은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는 거야. 밥그릇이 빗맞으면 열받아 젓가락을 팍팍 던지지” 하는 식이다.

또 딸아이 생일날 찾아온 또래 친구들은 “아저씨 발아래 있는 개새끼, 18년 된 개새끼 맞지요?”라고 합창하듯 말한 뒤 깔깔댔다. 지 씨가 아이들을 나무라자 돌아온 대답이란 게 이랬다. “너무너무 욕이 하고 싶어서요!”

재원이와 친구들은 지난해까지 ‘그랜드 체이스’ ‘메이플스토리’ 같은 온라인 게임을 했지만, 요즘은 플래시게임에 푹 빠져 있다. 엽기적이고 황당한 상상력의 근원은 바로 플래시게임의 스토리 만들기였던 것.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욕설을 ‘창작’하고 ‘전파’하는 곳도 플래시게임이다.

간단한 기술만 익히면 누구나 실행

지난해까지 온라인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흉내내 ‘무슨무슨니아’, ‘어쩌구도스’ 같은 그리스식 이름의 주인공들이 나오는 온라인 게임 소설을 쓰던 초딩들이 요즘은 어떻게 하면 플래시게임을 좀더 황당하고, 잔혹하며, 엽기적으로 만들 것인가 머리를 싸매고 있다.



플래시게임은 미국의 매크로미디어사가 1997년에 개발한 동영상 제작 프로그램 ‘플래시’를 이용해 만든 게임이다. 익히고 실행하기가 쉬워 복잡한 온라인 게임에서 소외된 유아나 어린이, 노인 대상 사이트에 많다.

또 독특한 아이디어와 기술만 있으면 개성 있는 그래픽 작품을 만들 수 있어서 미술 작가들이 비상업적인 작품을 만들거나 짧은 영화를 만드는 데 플래시를 이용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 대통령 선거 이후 네티즌들이 ‘촌철살인’의 정치 풍자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면서 컴맹들조차 플래시 애니메이션 한두 편은 봤을 만큼 확산됐다.

플래시가 초등학생들의 새로운 놀이문화로 자리잡은 것은 지난해 초등학생과 청소년들 사이에서 ‘허무송’이 대유행하면서부터다. ‘허무송’은 많이 알려진 동요 등의 마지막을 ‘허무하게 노가바(노래가사 바꿔 부르기)’하는 것. 예를 들면 ‘뽀뽀뽀’를 ‘아빠가 출, 엄마가 안 와, 만나면 반갑’이라고 음절을 자르고 왜곡해서 부른다. 처음에 플래시는 이런 ‘허무송’ 노래 파일의 ‘삽화’ 구실을 했다.

‘허무송’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이 올해 초부터 나오고 있는 ‘환타지 개그’다. ‘환타지 개그’는 아주 단순한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이용한 허무 개그다. 마치 아이들이 크레용으로 그린 것 같다(미국 현대작가 키스 해링의 그림과도 닮았다).

‘장땡’이란 네티즌이 만든 ‘환타지 개그’ 1탄. 교실에서 한 아이가 손을 들고 “선생님, 이번 시험 범위 몇 쪽에서 몇 쪽까지예요?”라고 묻는다. 선생님이 “앞쪽에서 뒤쪽까지”라고 대답한다. 아이가 다시 “선생님 시험 범위 몇 페이지예요?”라고 묻는다. 선생님이 대답한다. “홈페이지.” 끝.

‘환타지 개그’는 ‘초딩’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고, 지금까지 13탄이 나왔을 만큼 인기를 얻고 있다.

‘환타지 개그’의 일반적 특징은 아이들의 황당한 말장난을 ‘이박사’의 노래에 맞춰 ‘웃찾사’의 ‘왜그래’ 코너 개그맨들처럼 춤추는 장면으로 마무리 짓는다는 것.

이런 ‘환타지 개그’가 또다시 업그레이드된 것이 잔혹, 엽기 플래시게임이다. ‘탈출게임’ 시리즈, ‘피카추 죽이기’ ‘나쁜 놈에게 복수하기’ ‘사장님 괴롭히기’ ‘버스 부수기’ ‘남자 날리기’ ‘고이즈미 괴롭히기’ ‘컴퓨터 부수기’ ‘해피트리프렌즈’ 등이 인기다. 이런 플래시게임들은 전문업체(전문가)들이 만든 것과 일반 네티즌들이 만든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반 네티즌들이 만든 것을 ‘자작 플래시’라고 부른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자작 플래시’ 게임을 만든 ‘작가들’ 대부분이 초딩이라는 점. ‘허무송’과 ‘환타지 개그’ ‘자작 플래시’의 업그레이드 과정을 보면, 초딩들의 ‘기술발전’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컴퓨터 툴에 능숙해요. 하나를 배우면 둘을 응용해 만들어낼 줄 압니다. 아이들끼리 플래시 기술을 가르쳐주고 배우는 카페를 만들고 ‘환타지 개그’나 ‘자작 플래시’를 만들어요. 저작권 개념은 전혀 없지요. 오로지 조회 수를 늘리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만 있는 거예요.”

한 플래시제작전문업체 관계자는 “우리 같은 전문가들도 놀랄 때가 많다”고 말한다. 현재 ‘자작 플래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가도 11세 초등학생이다.

‘자작 플래시’는 기본적으로 황당한 시추에이션의 ‘환타지 개그’에 대부분 적을 ‘때려잡는’ 온라인 게임의 성격을 더하고 있다. 또 잔인함이나 폭력성 측면에서 외국에서 제작한 플래시물을 모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장님 괴롭히기’라는 플래시 애니메이션 게임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등을 풍자하는 정치적 내용이나 성적 유머를 담은 플래시들을 제작하는 외국 성인 플래시 사이트에서 모방한 것. 회사 상사가 들어와 잔소리를 해대면 ‘내’가 연필, 컴퓨터, 우산, 휴지통 등 사무집기를 이용해 상사를 잔혹하게 죽이는 게 게임의 내용이다. 연필로 뒷목을 찔러 피를 낭자하게 뿌린 뒤 사장이 죽으면 ‘청소부’가 와서 시체를 치운다. 게임 오버.

놀라운 상상력 인정받는 작품도 많아

‘피카추 죽이기’는 아이들이 좋아하던 만화 캐릭터인 피카추를 칼, 총 등 무기를 골라 잔인하게 죽이는 내용. ‘해피트리프렌즈’는 귀엽게 생긴 동물 캐릭터들이 갑자기 잔혹해져 친구들의 내장을 몸 밖으로 꺼내는 살육제 플래시 시리즈다.

원작의 내용은 자본주의사회와 거대 조직이 인간에게 주는 스트레스나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은유를 담은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그래픽도 세련된 성인물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를 알지 못한 채(성인물 경고 문구가 외국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린이 사이트와 블로그로 부지런히 이런 플래시들을 퍼나른다.

당연히 초딩들은 풍자와 은유에 반해서 이런 플래시에 열광하는 게 아니다. 피와 살이 튀는 잔인함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점, 폭력의 방식이 기발하다는 점, 그리고 공공연한 욕설 등 부모와 학교가 금지한 것들을 위반하고 또래끼리 나누는 행위에서 오는 일종의 ‘카타르시스’ 효과를 맛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초딩이 만든 ‘자작 플래시’ 중 유명한 ‘탈출게임’은 엄마의 감시를 피해 집에서 탈출하는 게임. ‘뒈진다’거나 ‘개지랄을 떤다’ 등으로 시작해 중간에 엄마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 ‘야, 이 미친 ○○○○ 같은 개새끼야. 또 어딜 나가려고 지랄이야. 나가기만 해봐. 들어오면 니 제삿날인 줄 알아’ 등 초강도 욕설로 점철돼 있다.

이런 목소리들은 보이스웨어라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무감정한 여성의 기계음(ARS 자동안내를 상상하면 된다)으로 들린다. 내용과 목소리의 극적인 대비에 갑자기 의표를 찔리면, 누구든 웃을 수 밖에 없지만 뒷맛은 떨떠름하기 짝이 없다.

무엇이 사람들의 즉각적 반응을 끌어내는지 초딩 ‘작가님’은 알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나연이는 “너무 잔인하고 무서워서 눈을 감고 있을 때도 있지만, 왠지 자꾸 보고 싶다”고 말한다.

초딩들의 ‘자작 플래시’ 붐은 IT 강국의 그늘이다. 초딩들이 게임업체를 키웠고, 주가를 받치고 있으며, 오늘도 그들은 ‘게임강국 대한한국’을 만드는 데 엄청난 시간과 코묻은 돈을 보태고 있지 않은가. 게임중독 전문가들은 초고속통신망을 설치한 모든 가정에 ‘다시’ 돈을 내고 통신회사가 제공하는 ‘아이들 보호 서비스’에 가입하라고 조언한다.

‘허무송’과 ‘환타지 개그’ ‘자작 플래시’가 초딩들에게 인기를 끄는 것은 이처럼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모순된 현실 때문이다. 어른들은 유해사이트를 폐쇄하거나 인터넷 사용시간을 제한할 수 있다. 하지만 잔혹, 엽기 ‘자작 플래시’가 유행하는 진짜 의미를 어른들은 알고 있을까? 어른들의 세계는 초딩들에게 어떤 권위와 신뢰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