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브루투스에게 아들들의 시체를 날라오는 형리들’, 1789, 캔버스에 유채, 323x422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순수미술’, ‘예술을 위한 예술’의 개념은 19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생긴 것이다. 프랑스대혁명 당시의 미술을 포함해 그 이전의 미술은 실용적이거나 실제적인 목적, 혹은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빈번히 동원됐다. 하지만 대혁명 이전까지는 그것이 의식화되지 않았으며, 예술가들이 이런 실제적인 목적으로부터 하나의 강령을 만드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대혁명은 바로 그 부분에 있어 전혀 새로운 흐름을 선보였다. “혁명과 더불어 처음으로 예술은 정치적 신조가 되었다.”(아르놀트 하우저) 이 흐름의 일선에서 대혁명의 예술 강령을 실천한 화가가 바로 신고전주의의 지도자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다.
다비드는 대혁명이 일어나자 혁명 진영에 적극 가담해 1792년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그때 그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국왕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앙시앵 레짐을 허물어뜨리는 데 적극 나섰던 열혈 혁명가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나, 이로 인해 그는 부인으로부터 이혼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렇듯 현실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그는 그만큼 격랑의 삶을 살았다. 그가 지지했던 로베스피에르가 과도한 공포정치 끝에 실각하자 그 또한 체포됐다. 다비드는 몇 달 동안 뤽상부르 궁에 갇혀 지냈는데, 그때 독방에서 하염없이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가 그의 생애의 유일한 풍경화를 한 점 그리기도 했다.
다비드의 ‘브루투스에게...’는 프랑스혁명의 정당성 옹호
이렇게 권력에서 밀려난 그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계기는 바로 나폴레옹의 부상이다.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자 그를 제정의 수석화가로 임명했다. 사실 기왕의 급진적인 공화주의자가 보나파르트주의자가 되어 제정과 독재를 지지한다는 것은 분명 모순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혁명의 이상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고, 제정의 절대군주 통치 형태에 혁명이 이뤄놓은 민주주의적 성과를 조화시키고자 나름대로 애쓴 인물이었다.
다비드는 조형예술을 통해 나폴레옹의 이와 같은 이상을 시각화하고 그를 찬미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선보였다. 이렇게 해서 다비드는 다시 프랑스의 문화예술 정책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최고의 문화권력이 됐다. 그러나 이런 출세도 잠시, 나폴레옹의 몰락은 곧 그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자 그는 브뤼셀로 망명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망명지에서 풍운아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혁명의 지지자로서 다비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초기 걸작 가운데 하나가 ‘브루투스에게 아들들의 시체를 날라오는 형리들’(1789)이다. 로마 공화제를 찬양함으로써 프랑스혁명의 정당성을 옹호하려는 의식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애국적, 영웅적 이상과 로마적 시민 덕목, 공화주의적 자유이념 등 혁명의 에토스가 충만한 걸작이다.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00~01, 캔버스에 유채, 271x232cm, 뤼에유말메종 국립 말메종 박물관.
키 작은 나폴레옹, 그림 속에선 늘씬하게 미화
그림에서 브루투스의 뒤로 형리들이 두 아들의 주검을 날라오고 있다. 오른편 여인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상실이 믿어지지 않는 듯 대성통곡하며 거의 실신할 지경이다. 이 슬프고도 참담한 현실 앞에서 브루투스는 꿋꿋이 스스로를 다잡고 있다. 공의를 지키기 위해 가족을 희생시킨 브루투스. 그런 그를 다비드는 진정한 애국자요,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해 다비드는 혁명의 이상이 얼마나 숭고한가 하는 사실과, 그 진정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처럼 순수하고 지고한 희생이 불가피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렇듯 다비드는 대혁명의 이상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현실 자체를 직접적인 소재로 삼기보다는 주로 고대 주제를 활용했다. 예외가 없지는 않았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마라의 죽음’(1793)이다. 이 작품은 그의 혁명동지 마라가 욕조 안에서 살해된 내용을 소재로 한 것이다. 혁명 당시 급진적인 산악파의 지도자였던 마라는 피부병이 있어 약을 푼 욕조 안에서 집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여인이 청원이 있다며 찾아와 문서를 내밀었는데, 마라가 그것을 읽는 사이에 여인은 그를 칼로 찔러 죽였다. 샤를로트 코르데는 지롱드당의 보수파였던 것이다.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캔버스에 유채, 165x128cm, 브뤼셀 왕립미술관.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그린 그림들은 이런 혁명 주제화와는 정신적으로 아무래도 거리가 있었다. 초점은 혁명에서 영웅으로 옮겨졌고, 그 영웅은 곧잘 지나치게 미화됐다.‘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0) 역시 나폴레옹을 미화한 작품이다.
나폴레옹을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 그림은, 후리후리하고 늘씬하게 생긴 나폴레옹이 말을 타고 군대와 함께 험한 알프스의 생베르나르 산을 넘어가는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대단한 정복자는 실제로 그림에서 보듯 후리후리하지도 않았고, 또 말을 타고 군대와 함께 산을 넘지도 않았다.
예술가도 사람이므로 시대의 풍랑에 적극 뛰어드는 경우가 있다. 화폭을 붙잡고 관념적인 세계를 꿈꾸지만은 않는다는 얘기다. 다비드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의 예술은 혁명을 통해 성숙했고, 혁명은 그의 예술로 빛이 났다. 물론 그만큼 굴곡 많은 삶을 살았지만, 그것이 그의 예술에서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음은 위대한 그의 그림들이 생생히 증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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