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양시 호계동 제일정공 김상재 사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금형틀에서 나온 TV 외관을 살펴보고 있다.
힌지란 슬라이드형 휴대전화의 폴더를 살짝 밀었을 때 반자동으로 올라가거나 내려가도록 하는 스프링장치. 한정된 공간에서 하루에도 수백 번씩 위아래로 작동해야 하기 때문에 내구성과 강도 측면에서 금속 재질 사용이 당연시됐던 것. 그러나 쉘라인 측의 끈질긴 설득에 삼성전자 관계자들은 두 손을 들었다.
삼성전자의 핵심기술 지원 등에 힘입어 지난해 1월 쉘라인은 마침내 세계 최초로 플라스틱 힌지 개발에 성공했다. 플라스틱 엔지니어링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당시 두께는 2.5mm였으나, 1.8mm를 거쳐 지난해 말엔 1.6mm에 불과한 슬림 플라스틱 힌지까지 내놓았다.
플라스틱 힌지 개발한 쉘라인
플라스틱 힌지 개발의 성공은 삼성전자와 쉘라인에 ‘윈-윈’ 결과를 가져왔다. 플라스틱 힌지는 금속형 힌지보다 가볍고 슬림화가 가능해 삼성전자는 이를 적용, 초슬림폰을 개발할 수 있게 됐다. 또 삼성전자는 힌지 구매가가 낮아지면서 연간 540억원에 달하는 원가를 절감하게 됐다.
삼성전자도 쉘라인에 플라스틱 힌지 구매 확대로 화답했다. 이에 따라 쉘라인 매출액은 2003년 226억원에서 2004년 327억원, 2005년 563억원으로 늘어났다. 올해는 100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쉘라인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기술 개발 과정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은 데다 설비자금을 무이자로 대출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삼성전자는 현재 쉘라인의 슬림 플라스틱 힌지를 적용한 초슬림폰 40여 종을 개발하고 있다. 신제품이 본격 출시되면 삼성전자 휴대전화의 경쟁력은 더욱 향상될 것으로 보인다. 5월 초 출시된 ‘스킨폰’은 3주 만에 하루 실개통 수가 최고 3300대를 돌파하며 빅 히트를 예고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쉘라인의 이런 ‘윈-윈’은 2003년 말 발표된 삼성의 ‘협력업체 상생경영 방안’ 프로그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삼성은 350여 협력업체에 시설투자자금 8750억원을 무이자로 빌려주기로 하는 등 향후 5년간 모두 1조원을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원 대상은 사출, 프레스, 금형, 전기, 기구 등 집중 육성이 필요한 5개 업종으로 정했다.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을 거듭하고 있지만 협력사들이 뒤를 받쳐주지 못하면 ‘모래성’에 불과할 뿐이라는 삼성 경영진의 판단에 따른 조치였다.
2004년부터 체계적인 지원
삼성전자는 그룹의 발표가 있자 2004년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협력업체 지원을 위해 전담 조직까지 만들었다. 경영지원총괄 구매전략팀 구매선진화그룹 김영도 부장은 “△부품 설비의 국산화 극대화 △차세대 기술 개발 및 육성 △공장 선진화 △협력사의 인재 육성 등의 추진 방향을 정하고 이를 위해 무이자 장기 자금 대여, 생산 노하우가 없는 곳엔 인력 지원, 인력 육성을 위한 교육 지원 등을 해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부장은 ‘협력업체 상생경영 방안’은 과거의 지원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삼성전자가 필요한 부분만 지원했고, 그나마도 외환위기 직후에는 삼성전자도 구조조정을 하느라 국부적 지원에 그쳤다. 하지만 2003년 이후엔 삼성전자 제품군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제품군에 부품을 납품하는 협력업체도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형성해가고 있다”는 것.
초슬림 슬라이드 휴대전화 생산을 가능하게 한 대구 달서구 대천동 쉘라인 생산라인.
삼성전자의 이런 방침은 협력업체 사이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처음엔 ‘생색내기용 아니냐’ ‘처음에만 요란하지 언제까지 가겠어’ 등의 의구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 실제 취재 과정에서 만난 삼성전자 협력업체 관계자들은 “삼성전자의 지원이 큰 힘이 된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렇다고 해서 삼성이 협력업체에 돈을 펑펑 쏟아붓는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최지성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장은 평소 직원들에게 “협력업체 가운데 사장이 현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일하는 업체는 적극 지원해주지만, 삼성 직원들을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하자거나 골프를 치자고 하는 업체는 절대 육성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경기 안양시 제일정공은 최지성 사장의 분류법에 따르면 적극 지원 대상. 제일정공과 함께 웰드리스 스팀몰드 기술을 개발했던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영상디스플레사업부 이상운 수석에 따르면 “김 사장을 비롯한 제일정공 임원들이 가장 늦게 퇴근할 정도로 항상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이 수석은 이어 “지난 20여 년간 삼성에 납품해 번 돈으로 다른 사업을 하다가 그 사업이 부실에 빠지면서 도산한 협력업체를 많이 지켜봐 왔는데, 제일정공은 한눈팔지 않고 금형기술 개발에만 올인한 업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일정공 ‘보르드 TV’ 개발 일등공신
제일정공은 1959년 국내 두 번째 금형공장으로 설립된, 국내 금형산업의 산증인이다. 삼성전자와는 79년부터 협력 관계를 맺어왔다. 최근 국내외에서 호평받고 있는 삼성전자 ‘보르도’ TV는 제일정공이 없었다면 탄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보르도’ TV에 적용된 웰드리스 스팀몰드 기술은 삼성전자와 제일정공이 2004년 2월부터 공동 개발에 착수, 그해 12월에 성공했다.
삼성전자가 웰드리스 스팀몰드 기술 개발에 착수한 것은 2004년 TV 외관을 납품받던 일본 업체에서 황당한 경험을 했기 때문. 제조 공정을 파악하기 위해 일본 업체를 방문했는데, 정작 이 업체는 기술 유출을 꺼린 탓인지 TV 외관을 찍어내는 금형틀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 삼성전자는 TV 외관을 결정짓는 핵심 기술인 금형기술의 국산화가 필요하다고 판단, 제일정공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공동 개발을 시작했다.
먼저 두 회사는 일본 회사에 로열티를 지불하고 스팀몰드 원천 기술을 들여왔다. 이후 삼성전자 금형기술팀 직원 2명이 제일공정 공장에 상주하며 협력에 나섰지만 일본에서 들여온 중소형 디지털TV용 금형틀 기술을 대형 TV로 확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2004년 12월 스팀몰드 자체 제작 능력을 확보했고, ‘보르도’ TV의 대박으로 이어졌다.
쉘라인이나 제일정공의 사례는 협력업체와의 상생이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상생이 결국 승승(勝勝)을 낳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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