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다빈치 코드’의 두 주인공 톰 행크스와 오드리 토투.
모나리자는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중요한 비밀을 안고 있는 그림으로 등장한다. 시온수도회의 수장인 다빈치가 예수의 비밀을 모나리자 속에 감춰놓았다는 것. 전 세계에서 4000만 부가 팔린 이 소설은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로 제작돼 다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올해는 또 ‘다빈치 코드’의 ‘주인공’인 모나리자가 완성된 지 꼭 5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소설과 영화의 인기, 그리고 원래 유명했던 그림에 대한 뒷이야기까지 맞물려 이래저래 모나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모나리자를 둘러싼 소문과 비밀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비밀을 감춘 미소?
모나리자가 제작되던 16세기 당시의 초상들은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유독 모나리자만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이 미소 때문에 모나리자가 그림을 그리던 다빈치를 유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19세기에 모나리자라는 이름은 ‘팜므 파탈’의 대명사였다.
2005년 말,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모나리자 미소의 비밀이 풀렸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의 생물측정학 전문가들이 모나리자의 미소를 과학적으로 규명했다는 내용이었다. 암스테르담대학의 하로 스톡먼 교수 팀은 모나리자의 모델과 같은 지중해 연안 태생 여성 10명의 얼굴을 컴퓨터에 입력한 뒤 이 얼굴들의 행복, 슬픔, 싫증, 공포, 놀람, 화남 등의 표정을 분석했다. 그 결과 모나리자의 미소에 들어 있는 표정은 행복 83%, 싫증 9%, 공포 6%, 화남 2%의 순으로 분석됐다는 것.
과학적 그림?
‘모나리자는 다빈치가 그렸다는 사실 외에는 모든 게 다 비밀’이라는 말도 있다. 모나리자의 미소 속에는 불멸의 진리가 감추어져 있다든가, 다빈치가 모나리자 그림 안에 ‘황금률’을 적용했다, 우주와 종교에 대한 상징체계의 암호가 숨겨져 있다 등등 모나리자를 둘러싼 설왕설래는 끝도 없다.
그러나 ‘모나리자가 신비한 비밀을 감춘 그림’이라든가 ‘과학적인 그림’이라는 식의 가설은 과장된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황금률’이라는 책을 쓴 천체물리학자 마리오 리비오는 “다빈치가 황금률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그가 모나리자 안에 황금률을 적용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모나리자의 신비’는 오히려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모나리자를 그린 다빈치의 붓질은 너무도 섬세해서 현미경으로 잡아내야 할 정도라고 한다. 프랑스의 화가 겸 미술사가인 자크 프랑크는 다빈치가 1/4mm 길이의 붓질을 30겹 이상 채색해서 모나리자를 그렸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섬세한 작업을 위해 다빈치는 한 손에 붓, 다른 한 손에 확대경을 들고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게 프랑크의 추측이다.
모나리자의 모델은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라는 상인의 두 번째 부인 리자 디 게라르디니로 알려져 있다. 그림을 그릴 당시 리자의 나이는 스무 살 정도였다고 한다. ‘모나’는 이탈리아어로 ‘마담’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리자 디 게라르디니 외에도 진짜 모델은 남자였다는 설, 동성애자인 다빈치가(다빈치는 일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24세 때는 남색죄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자신을 모델로 그렸다는 설도 있다. 다빈치가 만년에 그린 연필 자화상이 모나리자와 비슷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다빈치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연필 자화상 자체가 19세기 화가 주세페 로시가 그린 위작이기 때문에 다빈치 자화상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대신 모나리자의 모델이 다빈치 자신이라는 설은 화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마르셀 뒤샹은 모나리자의 얼굴에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려넣었고, 사진작가 필리프 할스망은 ‘달리의 콧수염을 단 모나리자’라는 몽타주 사진을 제작했다.
모나리자는 미완성인가
‘모나리자는 미완성된 작품이다. 그래서 눈썹이 없다.’ 어릴 때 이런 이야기를 누구나 한두 번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모나리자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꾸준히 돌고 있는 가설 중 하나다. 이탈리아 레오나르도 박물관의 알레산드로 베초사 관장은 “다빈치가 오른팔의 일부 마비 증상으로 고생했으며, 그 때문에 모나리자를 완성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미술사학자 노성두 박사는 “모나리자는 미완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다빈치는 프랑스에서 사망하던 시점까지 모나리자를 가지고 다녔다. 초상화를 주문한 사람에게 넘기지 않고 화가가 끝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이 작품이 미완성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는 것. 그러나 1503년에 제작을 시작해 1506년에 완성된 작품이라는 설, 1505년에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다빈치가 1506년 이 작품을 일단락 지은 뒤에도 10년 이상 손질을 계속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이유는?
이탈리아 화가의 작품인 모나리자가 파리에 있는 이유는 무얼까? 다빈치는 만년에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는 1519년 앙부아즈 성의 배수로 공사를 지휘하다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때 다빈치가 갖고 있던 짐 중에 모나리자가 있었다. 모나리자는 다른 그림들과 함께 다빈치의 후견인인 프랑수아 1세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프랑수아 1세는 이 그림을 퐁텐블로 성에 걸어두었다. 그 후 프랑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모나리자를 가져다가 자신의 침실에 걸었고, 1804년 루브르에 기증했다. 모나리자는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내내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인가
루브르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직접 본 사람들은 대부분 “애걔걔, 저렇게 작아?”라는 말을 내뱉고 만다. 모나리자는 크거나 화려한 그림이 아니다. 그래도 매년 600만 명의 관객들이 77cm×53 cm 크기의 포플러 나무판에 그려진 이 그림을 보기 위해 루브르박물관을 찾아온다. 박물관 측은 1956년 한 볼리비아인 남자가 이 작품을 향해 돌을 던진 이후로 작품 보호를 위한 특수 방탄유리를 설치했다.
하버드 대학의 프랭크 페렌바흐 교수(역사학)는 모나리자가 유명해진 이유로 ‘1911년 루브르 도난사건’을 든다. 1911년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돼 있던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두 명의 이탈리아 남자가 전시실에서 모나리자를 떼내어 들고 나갔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이탈리아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이 사건 용의자로 몰려 수감되기도 했다. 그러나 범인은 루브르의 직원과 이탈리아인 화가였다. 모나리자는 2년 후인 1913년 11월 이탈리아 피렌체의 한 호텔에서 발견돼 이듬해 1월 무사히 루브르로 돌아왔다. 그림을 되찾을 때까지 모나리자는 거의 매일 유럽의 신문에 등장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모나리자는 오늘의 유명세를 얻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