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사업장 내 VIP센터에서는 참신한 상품 기획을 위해 젊은 연구원들에게 ‘파격’을 권장한다.
● 세계 최초 개발 4쿨링 콰트로 냉장고
“부장님, 회식도 좋지만 그냥 집에 가서 잠 좀 자게 해줄 수 없습니까?”
지난해 초 삼성전자 시스템가전사업부 냉기개발팀 이병무 수석은 팀원들에게 “오랜만에 회식이나 하자”고 제안했다가 오히려 이런 하소연을 들어야 했다. 4도어 냉장고 ‘지펠 콰트로’ 개발에 지친 팀원들이 “회식보다는 잠을 달라”며 애교 섞인 항명을 한 것. 순간 이 수석의 뇌리에 그동안의 강행군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개발팀원들은 2004년 4월 4도어 냉장고 개발에 착수한 이후 마음 편히 쉬어본 적이 없었다. 명절 때도 장남이 아닌 엔지니어들은 귀향을 포기해야 했고, 심지어 진급 시 반드시 받아야 하는 회사 내부 교육도 빠져야 했다. 젊은 엔지니어들은 “데이트할 시간이 없어 애인과 헤어졌으니 회사가 책임져야 한다”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이병무 수석은 “소비자의 편의에 따라 4개의 저장공간을 냉동과 냉장용으로 자유롭게 변환할 수 있는 ‘지펠 콰트로’ 개발 과정은 한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무엇보다 세계 최초의 4도어 냉장고여서 벤치마킹 대상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개발 과정에서 생긴 문제는 개발팀 스스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당연히 숱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고, 그럴수록 개발팀원들은 밤잠을 포기해야 했다.
세계 최초의 4도어 냉장고 ‘지펠 콰트로’.
4개의 저장공간 가운데 2개를 서랍식 저장고로 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주부들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저장고를 여닫을 수 있도록 레일을 이용했는데 레일에 남아 있는 물기가 냉동 시 서리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이 저장고는 잘 열리지 않았고 한동안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결국 팬을 돌려 레일에 남아 있는 물기를 증발시키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충격에도 이상이 없는지 검증하는 실험도 만만치 않았다. 이 실험은 냉장고를 영하 30도에서 얼려서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아야 통과된다. 이병무 수석은 “이런 신뢰성 실험이 큰 항목만 해도 80여 가지나 되기 때문에 개발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는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삼성은 특히 ‘지펠 콰트로’에 삼성의 독자기술인 독립냉각방식 기술을 한 단계 발전시켜 4개의 냉각기를 적용, 냉장실내 습도를 72% 수준으로 개선했다는 점을 크게 내세우고 있다. 냉장실내 습도는 식품의 신선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일반 양문형 냉장고의 냉장실내 습도는 17% 안팎이다.
‘지펠 콰트로’는 2007년 전 세계 양문형 냉장고 시장 1위 달성을 목표로 개발된 삼성의 야심작. 2007년은 삼성전자가 양문형 냉장고 사업을 시작한 지 꼭 10년째가 되는 해다. 삼성은 미국 시장에서 ‘지펠 콰트로’ 가격을 2999달러로 책정했음에도 시장의 반응이 좋아 고무돼 있는 모습이다. 일반 양문형 냉장고는 1800달러 수준이다.
‘지펠 콰트로’ 개발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3도어 냉장고가 나온 것을 본 이병무 수석은 ‘다음에는 어떤 혁신 제품을 내놓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무렵 미국 법인의 상품 기획 담당자가 4도어 냉장고 개발의 필요성을 제안했고, 국내 판매법인에서도 비슷한 요청이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2004년 4월 4도어 냉장고 개발 목표가 정해졌고, 1년 6개월여 만에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
● ‘TV는 가구다’, ‘보르도’ LCD TV
지난해 7월 초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내 한 건물에 캐주얼 차림의 직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왼쪽 귀에 귀고리를 한 자유분방한 스타일의 신세대 직원도 끼여 있었다. 반면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넘긴 전형적인 삼성맨 스타일의 과장급 직원도 있었다. 한 방에 모인 이들 태스크포스팀에 주어진 과제는 ‘다음해 봄 시장에 내놓을 신제품 TV를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지난해 11월29일 광주사업장에서 열린 지펠 콰트로 냉장고 출하식 .
조사 결과 이들의 결론은 단순했다. 과거처럼 화질이나 기능으로 타 회사 제품과 차별화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점이었다. 대신 집안 분위기에 맞는 고급가구라는 데 초점을 맞춰 개발하기로 했다. 태스크포스팀 관계자들은 마침 디자인 부서에서 제시한 와인잔을 형상화한 디자인 시안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이것이다’라고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들의 작업은 TV의 개념을 ‘기능적 TV’에서 ‘감성적 TV’로 바꾸는 일대 모험이었다. 기술적으로 이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럼에도 개발팀 내부에서는 논란이 거의 없었다. 김민석 대리는 “소비자 조사를 통해 소비자들이 TV를 가구의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국가대표팀 축구 감독 아드보카트를 모델로 내세운 ‘보르도’ TV.
태스크포스팀은 ‘보르도’ TV 개발 과정에서 수없는 난관을 돌파해야 했다. 지난해 9월 말 무렵, 당초 디자인 시안대로 시험제품을 제작해 최지성 사장에게 보고하자 최 사장의 반응은 한마디로 “당장 집어치우라”였다. 당시 32인치의 두께가 100mm였는데, 더 얇게 하라는 질책이었다. 결국 80mm의 초슬림으로 결정됐다. 좁은 공간에 모든 회로를 집어넣어야 하다 보니 회로팀은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금형 기술도 문제였다. ‘보르도’ TV는 붉은 포도주가 담긴 와인잔 모습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어서 금형 기술이 받쳐주지 않으면 이를 제대로 구현할 수 없다. 또 제품의 앞면뿐 아니라 테두리와 후면까지 표면 전체를 광택처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다행히 협력업체 가운데 제일정공㈜ 등 3개 업체가 삼성전자와 함께 개발한 웰드리스(weldless) 스팀몰드 기술을 갖고 있어 큰 힘이 됐다.
웰드란 TV 외관에 나타나는 가는 실 모양의 접합선을 말한다. 과거에는 이를 감추기 위해 도장을 했다. 그러나 고온의 스팀을 이용해 사출을 하면 웰드가 생기지 않을 뿐 아니라 표면 광택도 뛰어나 아크릴시트를 따로 붙일 필요가 없다. 김민석 대리는 “웰드리스 스팀몰드 기술을 처음 개발한 곳은 일본이지만 이를 꽃피운 것은 삼성전자”라고 자랑했다.
DMB 플레이어로 변한 ‘센스Q1’.
● ‘제3의 물결’ 이끄는 UM PC
3월10일 독일 하노버 세빗(CeBIT) 컨퍼런스 룸. PC시장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삼성전자와 인텔, 마이크로소프트(MS) 등 3사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개발한 새로운 플랫폼을 발표했다. 이 플랫폼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기존 PC 기능 및 인터넷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모바일 시대’의 선구자라는 게 3사의 설명이었다. ‘Ultra Mobile PC(UM PC)’ 센스Q1이 바로 그것이다.
센스Q1은 PC 업계에 불어닥친 ‘제3의 물결’이 될 것이라는 게 삼성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1세대는 IBM 컴팩으로 대표되는 8086/8088 PC였다. 2세대는 과감한 유통 혁명을 통해 새로운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델 컴퓨터가 대표적이다. 센스Q1은 이들을 이은 ‘제3세대’로, 책상 위에선 인터넷 검색과 워드 작업, 지하철에선 동영상플레이어, 자동차 안에선 네비게이션으로 쓸 수 있는 다기능 휴대용 PC다.
센스Q1 개발은 2004년 말에 시작됐다. 삼성전자 컴퓨터시스템 사업부 전략마케팅팀 엄규호 상무는 “컴퓨터란 게 PC와 노트북으로 정해져 있는데, 당시 3사 모두 새로운 세그먼트를 만들지 않으면 더 이상 성장이 힘들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면서 “이를 위해 우선 고객의 욕구부터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해 세계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다”고 설명했다.
이 조사에서 소비자들은 이동하면서도 e메일을 체크하거나 웹 서핑을 할 수 있기를 가장 많이 원했고, 그 다음으로 원한 것은 엔터테인먼트 등 부가 기능이었다. 3사 관계자들은 소비자들의 이런 욕구를 하드웨어로 구현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핸드백에 들어가는 노트북’을 개발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
가장 큰 문제는 화면 크기를 얼마로 하느냐였다. 휴대하기 편하면서도 일반 PC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기능을 구현할 수 있으려면 7인치가 가장 적당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7인치의 화면은 2002년에 출시된 넥시오(nexio)의 단점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넥시오는 출시 이후 국내에서 3만 대 정도 팔리면서 마니아층을 형성했지만, ‘대박’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휴대성 측면에서는 유용했지만 화면 크기가 5인치에 불과해 윈도 구현이 안 돼 컴퓨팅 기능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 e메일의 경우도 첨부 파일을 읽을 수 없다는 단점도 있었다.
화면 크기가 정해지면서 삼성전자와 인텔, MS 등 3사는 서로 역할을 분담해 개발에 들어갔다. 우선 MS는 12인치 이상의 화면에 맞춰져 있는 윈도 해상도를 7인치 화면에 맞추기로 했다. 인텔에 맡겨진 임무는 스케일을 자동적으로 조정해주는 ‘오토 스케일링’ 기능과 저전력·저소모 CPU 개발이었다. 삼성전자는 두 회사의 성과를 통합해 상품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막상 제품화 과정에 들어가니 3사의 역할 분담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았다. 에러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이 소프트웨어 쪽인지 아니면 하드웨어 쪽인지를 밝혀내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기 때문. 겨우 소프트웨어 쪽 문제라는 것을 밝혀내도 삼성 직원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인텔의 인도 연구소나 MS의 미국 시애틀 연구소를 찾아가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특히 오토 스케일링 기능 개발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시간을 다투는 일이었는데 개발 도중 인텔의 조직 개편으로 일부 개발 인력이 빠져나가면서 시간을 낭비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삼성 개발 인력을 인도에 직접 파견해 함께 개발에 나서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5월 초 출시 이후 다행히 시장의 반응이 뜨거워 개발팀 관계자들은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엄규호 상무는 “일부에서 센스Q1에 대해 ‘입력장치가 불편하다’ ‘배터리 수명이 짧다’ 등의 지적이 있어 다음에는 더 얇고 더 가벼운 제품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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