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선생과 학생이 나란히 성병에 감염돼 모두 조퇴하는 첫 장면에서 키치의 수위를 훌쩍 넘어버리더니, 이후엔 대한민국의 모든 것, 즉 근대성이 낳은 억압과 자본의 노예가 된 세태를 무차별로 풍자한다. 이성, 논리, 도덕, 모범성의 굴레를 훌훌 벗어나 발칙함과 황당함으로 무장한 ‘다세포 소녀’는 단세포 세상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매우 낯설 수 있지만 영화는 의상, 조명, 색채, 전달하는 정서 모두가 일종의 과잉으로 구성돼 있다. 현실성이 고의적으로 거세된 이러한 유형의 영화를 흔히 ‘캠피 무비’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영화 속의 교실은 완전 원색인 데다 인물들의 화장은 떡칠에 가깝고, 의상은 국적과 스타일이 불분명하다. 모든 것이 튀는 캠피 무비는 과거 B급 영화나 퀴어 영화에서 쓰던 전형적인 영화 전략으로, 외국에서는 ‘프리실라’나 ‘헤드윅’ 같은 작품, 우리나라에서는 최진성 감독의 ‘동백꽃’ 등이 그 계보에 속한다.

쾌락의 명문인 무쓸모교에선 모든 것이 거꾸로 간다. 선생님이 성병으로 조퇴하자 반장 소녀가 조퇴하고, 반장 소녀가 조퇴하자 그 옆의 남학생이 조퇴하고, 그 옆의 남학생이 조퇴하자 그 앞의 여학생이 조퇴한다. 남학생은 조퇴하는 여학생 등 뒤로 “처녀라고 그랬잖아”라며 소리치고, 여학생은 “1대 1 관계가 처음이라는 거지”라고 대꾸한 뒤 사라진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벌해달라고 ‘엉덩이를 깐’ 선생은 채찍 도구를 든 마조히스트이고, 채찍을 휘두르는 여학생은 사디스트다. 주인공인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이 영화에는 이름이 세 글자인 캐릭터가 없다)가 원조교제 약속이 있다고 나가버리자, 선생님은 오히려 그녀를 ‘효녀’라고 말한다. 게다가 사이버상에서 야한 밀담을 나누던 남학생은 상대가 자기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성병 걸린 선생님, 사디스트 여학생 등 엽기 캐릭터
사태가 이러하니 대한민국의 문화적인 코드들 역시 죄다 기존의 맥락에서 미끄러져버린다. 캔디류의 순정만화적인 요소가 비틀어지고, ‘정’을 강조하는 박카스 CF가 패러디되며, 국수주의적인 교육 내용이 통렬한 화살을 맞는다.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스위스에서 전학 온 안소니(캔디의 바로 그 캐릭터)를 보고 첫눈에 반하지만, 안소니는 정작 여장 남자인 두눈박이(그 혹은 그녀는 교실의 왕따인 외눈박이의 동생이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선생님이 태권도의 유일무이함에 대해서 설명하자, 학생들은 “태권도는 가라테에서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뮤지컬이 세대와 계급을 대통합하는 행복을 파는 장르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공의 순진무구한 무지함이나 정서적 단순성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특히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가 카메라를 보고 이야기한다든가, 인물 대부분이 정면으로 찍히는 등 모든 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텍스트와 거리를 두게 만드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다세포 소녀’에는 성 담론은 넘쳐나지만, 정작 성행위는 부재한다. 그로 인해 이 영화는 어른들을 위한 우화 혹은 사회 비판적인 B급 영화로까지 확대된다.
숱한 성 담론에도 성행위 장면은 없어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원작 만화의 재기발랄함은 있지만 인터넷 만화가 가지고 있는 대담성과 신맛은 좀 덜한 것 같고, 무엇보다도 모든 경계를 넘어 무한대의 자유로움과 다양성을 지향하는 이 영화 역시 캠피 무비라는 어떤 공식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왕 저지르는 것, 더 많이 더 멀리 만화적 상상력을 차용하는 것은 어땠을까.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여다오.
다세포 영화가 노리는 다세포 관객들의 ‘19금’의 욕망은 아직 완전히 충족되지 않았다. 장르적 핵분열을 거듭하는 대한민국 영화판에서 의미 있는 스타트를 끊은 ‘다세포 소녀’. 우리 영화판에도 ‘다세포 소녀’ 같은 영화적 시도가 끊임없이 증식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