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고지도.
구어역은 경주와 울산의 거의 중간 지점에 있는 역촌이다. 통신사 일행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 지금은 번창함을 입실역에 빼앗기고 한적한 시골마을에 불과한 모습이다.
경상도 동부 방위 주요 기지
곧이어 관문성터를 통과한다. 관문성은 경주를 지키기 위한, 말 그대로 관문이다. 신라 성덕왕 21년에 처음 축조되었다. 관문성 평지 부분은 사라졌지만, 성벽 일부가 산속에 남아 있다. 성터 부분이 지금 경주시와 울산시의 경계선이다.
저녁에 울산부에 들어갔다. 주수(부사) 홍익대는 내가 두 해 동안 경상도를 안찰할 때 대구판관이었는데, 현재의 직임으로 승진했다. 또 영남에서 만났으니 오랫동안 남쪽에 체류한다고 할 만하다. 좌병사 신광익, 우후(虞侯) 이문국이 보러 왔다.
여기서 ‘좌병사’란 울산읍 동방 5리의 병영성에 주둔하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말한다. 동래 좌수영과 더불어 경상도 동부 방위를 맡은 지휘관이었다. 조선 태종 15년 때 경주 동남 방향 20여리에 설치되었다가, 몇 번의 이동 끝에 선조 37년 현재 유적이 있는 위치에 고정되었다. 안동의 전영, 대구의 중영, 경주의 후영은 모두 울산 좌병영 지휘 아래 들어간다. 고을 격으로, 규모로는 이들 3개 고을에 뒤지나 군사적인 면에서는 울산이 이들 위에 군림했다. 물론 긴 해안선을 가진 울산의 지정학적 특성상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역대 통신사 중에서는 울산읍에서 묵지 않고, 병영에서 접대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조엄의 경우 홍익대와의 특별한 친분 때문에 울산부에서 쉬었을 수도 있다.
일제 초기 지도를 보면 울산읍과 병영 마을의 규모가 별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다 구한말부터 어업기지 및 연안항로의 기항지로서 방어진이 번창했으니, 울산은 3개 중심지가 나란히 번성하는 특수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병영이나 방어진과 구별하기 위해 울산부 관아 소재지는 ‘울산 본부(本府)’ 혹은 ‘본부’라고 불렀다. 그냥 ‘울산’이라 하면 세 곳 중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르신들은 울산 구시내를 ‘본부’라고 부르곤 한다.
관문성터(위). 성벽의 일부만 남은 병영성.
이날은 90리를 갔다.
8월19일(계묘)맑음용당창에 닿았다.동래부의 교리 수십 인이 뵈러 왔다.
울산부터는 태화강을 건너 현재 7번 국도를 따라 동래로 내려가게 된다. 용당창은 현재의 양산시 웅상읍 용당리다. 지금도 장터마을이 남아 있는데 거의 모든 통신사 일행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잤다. 동래부 교리가 몇십 명 마중 나와 여기서부터 동래부의 선도로 길을 가게 된다. 중국 사신으로 간 연행사가 서울로 돌아올 때, 고양 벽제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룻밤을 자면 이제 나머지 이틀로 국내 마지막 행로인 동래, 부산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날은 60리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