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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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영남 터미널’ 명성뿐

주요 길목이던 영천 이젠 쇠락한 고장 … 조양각, 호연정 등 말없이 과거 영화 증언

  • 도도로키 히로시/ 숭실대 일본학과 강의교수 hstod@hanmail.net

    입력2005-06-16 16: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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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년 전 ‘영남 터미널’ 명성뿐

    조선 후기 의흥 읍내의 모습.

    -8월15일(기해) 맑음. 신녕에 닿았다. 새벽에 세 사신 및 일행들과 함께 관복을 갖추고 망궐례를 행하였다. -

    망궐례(望闕禮)란 말 그대로 궁궐, 즉 왕이 있는 곳을 향해서 절을 하는 것이다. 이는 임금을 공경하고 충절을 나타내기 위한 의식으로, 주로 궁궐에서 멀리 떨어져 근무하여 직접 왕을 배알할 수 없었던 지방 관리나 원행의 관리, 과거에 낙방하고 귀향하는 선비, 유배지에 있는 관리 등이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행했는데, 가끔 지방관의 취임식 및 이임식 때도 행해졌다. 원래 지방관의 주최로 치러지는데, 조엄은 행차 중 보름을 맞아 참여하게 된 것이다.

    망궐례는 왕과 궁궐의 상징인 전패(殿牌)를 모신 객사에서 행해졌다. 객사의 중앙에는 왕 내외를 대신하는 전패가 모셔져 있고, 사람들이 마당에서 예를 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절하는 방향이 꼭 서울은 아니었다. 조엄이 망궐례를 한 장소는 의성 객사였을 것이다. 지금의 의성중앙초등학교 자리인데, 이젠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낮에 의흥현에서 쉬는데, 주수(사또) 김상무와 성주목사 한덕일이 들어와 뵈었다. -

    의성에서 통신사 길은 중앙선과 같이 남하한다. 탑리 기차역을 지나고 청로역이 있었던 청로마을을 거치면 의흥읍에 들어선다. 의흥은 일제시대에 군위에 합병되었다.



    영천까지 마중 나온 경상감사

    -저녁에 신녕현에 이르니, 주수 서회수와 군위현감 임용, 성현찰방 임희우, 지례현감 송부연이 보러 왔다. -

    신녕도 원래 독립된 읍이었으나 지금은 영천시 일부가 되었다. 현재까지 도시가 발달되지 않아서 찰방역(察訪驛)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이날은 90리를 갔다.

    16일(경자) 맑음. 영천에 닿았다. 도백 김상철이 보러 오고, 이어 전례인 전별연을 조양각 위에 벌였다. 내가 비록 복제(상복 차림) 중이나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풍악을 울리고 상을 받을 때엔 방 안으로 피해 들어갔다. 반나절 동안 순상(도백)과 세 사신은 이야기를 하였다. 대개 이는 영남의 성대한 모임이므로 구경하는 사람이 거의 만명으로 헤아려졌다. -

    200년 전 ‘영남 터미널’ 명성뿐


    200년 전 ‘영남 터미널’ 명성뿐

    영천읍 조양각.

    도백이라 함은 경상도 감사, 즉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된다. 물론 품계는 감사보다 통신사가 위이나, 대구에 있는 감사를 영천까지 오게 하는 것을 보니 통신사의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영남의 성대한 모임’이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10명의 관직들이 지대(支待·시골로 나가는 높은 벼슬아치의 먹을 것과 쓸 물건을 그 시골의 관아에서 이바지하던 일)를 맡았고, 군중이 만명이라니 가히 그럴 만했다.

    영천은 대구에서 경주로 가는 길과 의성에서 경주로 가는 길의 합류 지점이자 중요한 길목이다. 통신사 사행로는 영남대로와 달리 경상도의 중심인 대구를 무시해버린다. 대신 대구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영천이 서브 터미널 구실을 했다. 이러한 교통요충지로서의 성격이 영천의 위상을 높여왔다. 신작로도 벌써 대한제국 말인 1907년에 착공되었고, 일제시대에는 철도의 분기점이 되기도 했다.

    지난 4·30 재보선 때 한나라당 아성인 경북에서 유일하게 열린우리당에 선거구를 내줄 뻔했던 곳이 바로 이 영천이다. 이유인즉, 아무리 한나라당 의원을 보내봐야 주변 포항이나 경산에 비해 계속 쇠퇴해가는 데 대한 불만의 표시라고 했다. 200년 전의 ‘영남의 총집결지’가 ‘쇠퇴한 고을의 대표격’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실제로 영천 읍내에서 활기찬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새마을호가 정차하는 역 앞은 거의 고스트 타운(유령의 도시)이다. 토요일 오전이라는 시간 탓일지 모르겠지만, 먼 하늘을 쳐다보는 아저씨들 몇 명만 눈에 띌 뿐 정지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사람도 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새마을과’에서 문화관광 챙겨

    지금의 영천역은 중앙선 개통과 더불어 일제시대 말기에 조성돼, 계획적으로 갖춰진 격자형 도로를 갖고 있다. 당시에는 아주 번창했을 것이다. 사람이 없는 거리를 지나 북쪽으로 가면 강이 나온다. 영천은 원래 이 강보다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다리 오른쪽 벼랑가에 누각이 하나 보인다. 조엄과 경상감사가 담소를 나누었다는 ‘조양각’이다. 경내에는 영천문화원도 있다. 그 뒤에는 영천동헌이 있었는데 헐린 뒤 영천시청으로 사용되다가 시·군 통합으로 청사가 폐지되면서 지금은 보건소가 들어서 있다.

    조양각이 벼랑가에 있다고 했지만, 영천고을 남쪽은 모두 벼랑으로 돼 있어 일종의 천연 요새였다. 그래서 영천읍성 남쪽 아래쪽에는 성벽이 없었다. 영천교 북단에는 남문이 있었다. 아마도 통신사 일행은 서문에서 들어와 남문에서 나갔을 것이다.

    성벽은 의성과 마찬가지로 일찍이 많이 훼손되었다. 해안선에서 가까운 이른바 해읍(海邑)에 비하면, 내륙의 읍성은 전시가 아니면 군사적 중요도가 떨어졌다. 이미 조선 말기 영천읍지도에는 ‘성허(성터)’, 즉 성의 흔적만 표시해두고 있을 뿐이다.

    200년 전 ‘영남 터미널’ 명성뿐

    한천에서 바라본 영천읍.

    혹시나 읍성에 대한 자료가 있을까 해서 영천문화원의 문을 두드렸다.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직원은 ‘그런 자료는 없어요, 시청으로 가보세요’라고 말하곤 자기 업무로 돌아갔다. 시청에 도착, 먼저 문화관광을 담당하는 부서를 찾았다. 하지만 그런 부서는 없었다. 그래도 문화재 관리를 담당하는 부서는 있을 터라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새마을과’였다. 관광국과 그 밑에 전략별로 몇 개의 과를 두고 몇 십명의 전담 직원이 있는 ‘옛길왕국’ 문경시와 같은 경북인데도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났다.

    다행히 직원 한 분이 친절하게 응대해주셨다. “관광과가 있었는데 구조조정으로 없어졌다”고 했다. 인력과 예산이 없어 읍성의 위치 확인이나 복원 등은 하늘의 별따기고,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문화재를 모은 책자를 제작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하던 그 직원이 나를 지금은 시장이 되어 있는 객사 앞까지 데려다 줬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규장각에서 영인한 영천읍 지도를 보더니, 그는 “우리도 좀 갖자”며 복사를 해갔다. 어쨌거나 인심은 좋은 동네다.

    벼랑의 서쪽 끝에 아기자기한 한옥이 있다. ‘호연정’인데, 개인이 관리하고 있었다. 주인은 향토사를 공부하며 성벽 위치도 복원하고 책자도 펴내고 계셨다. 필자에게는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런 분을 문화원장으로 발탁해드리고 싶었다.

    -이날은 40리를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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