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9일(계묘)맑음용당창에 닿았다.
용당창은 현재 7번국도 변에 있는 양산시 웅상읍 용당리 용당마을을 가리킨다. 창(倉)이 있었던 곳이긴 하나 귀빈 숙소 구실도 했다. 통신사 일행이 동래에 입성하기 전 이곳에서 하루 머무는 게 통례였다. 용당 마을 앞뒤에 상당히 긴 구간의 옛길이 남아 있다.
이날은 60리를 갔다.
8월20일(갑진)맑음동래에 닿았다.
십휴정(十休亭)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종사관이 벌써 이르렀다. 같이 5리 길을 가니, 부사 정만순이 의장을 갖추고 국서를 길가에서 맞이하고(후략).
배와 기상 체크 부산진에서 대기
‘십휴정’이란 십휴정 기찰이라고도 했는데 현재의 부산시 부곡동을 말한다. 기찰이란 검문소와 같은 구실을 한 기구로 밀무역자나 밀입국자를 단속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일본이 가까워진 것을 느끼게 해준다. 지금도 이 동네 일대를 ‘기찰’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3사가 다시 만나, 정장을 입고 동래성으로 입성하는 것이다. 동래 읍성은 지금 동래구청 일대이며 향교와 동헌이 남아 있다. 통신사 일행은 일부러 남문으로 들어갔다. 남문이 정문으로 여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8월23일(병오)맑음부산에 닿았다.
부산은 동래에서 20리밖에 안 떨어진 코앞이지만 당시에는 별개의 마을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부산은 부산진을 뜻한다. 부산진 안에는 사신이 머물던 숙소가 있었다. 부산에서는 으레 며칠을 대기했다. 좌수영 선소(조선소)에서 제작하는 배와 순풍이 부는 날을 기다려 대마도를 향해 출항했기 때문이다. 출항 장소는 부산진 앞 영가대다.
영가대(永嘉臺)란 현재 부산시 동구 범일동의 성남초등학교 옆에 있었던 정자의 이름이다. 지금으로서는 믿기 어렵지만, 옛날에는 여기가 바닷가였던 것이다.
대마도는 일본에서는 쓰시마라고 한다. ‘시마’란 섬이라는 뜻으로 보통 한자 도(島)의 훈독이지만, 쓰시마의 경우 대마(對馬)라고만 써서 쓰시마라고 읽는다. 두 개의 섬으로 한 쌍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 본토에서 보면 아주 외딴섬으로, 지금도 일본 관광객들은 별로 찾아가지 않는다. 느낌으로는 한국의 홍도나 거문도와 비슷하다. 대신 부산항에서 매일 고속선이 운항되어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찾아간다. 여기저기에 한글 간판이 보이고, 좌측통행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 운전자를 위해서 차선에 일일이 통행 방향 화살표를 그려넣었다. 아마도 지금 쓰시마 경제는 한국인 관광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 상황은 일제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쓰시마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는 부산이었기에 큰 장을 볼 때는 지금의 국제시장으로 갔다고 한다.
이즈하라에 많은 유적들 남아
조선시대에도 쓰시마는 역시 한반도에 의지해서 살았다. 평야가 별로 없는 작은 섬이다 보니, 조선과의 교역에서 활로를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에도막부는 쓰시마 영주에게 조선과의 독점적인 교역권을 주었다. 이로써 쇄국 중인데도 쓰시마는 공공연히 대외무역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부산 용두산 주변에는 쓰시마 무사와 상인의 교역 거점인 초량 왜관이 세워졌다. 무사들은 살기 위해 조선과 장사를 했고 한국어를 배웠다. 한반도가 없으면 쓰시마 사람들은 밥줄이 끊기는 것이다. 그래서 통신사 일행을 크게 환영했다.
쓰시마의 중심지이자 영주가 거주하는 도시는 이즈하라(嚴原)라고 한다. 섬의 동남쪽에 있다. 최근까지 이즈하라읍이라는 행정구역이었는데 지난해 쓰시마 통합시가 생기면서 도시 이름이 사라졌다. 통신사 일행을 태운 선단은 먼저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포구인 사스나에 도착한다. 여기서 쓰시마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섬 연안을 시계 방향으로 돌며 여타 포구들을 들르면서 이즈하라까지 간다. 이즈하라에는 대선단이 정박 가능한 항구가 구축되어 있었다. 지금도 그 유구를 볼 수 있다.
이즈하라에는 면암 최익현의 순국비와 고려문 등 조선과 유래가 깊은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통신사 기행을 마무리하기에 이보다 더한 장소는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통신사 일행의 일본 여정은 이제 시작이지만.
용당창은 현재 7번국도 변에 있는 양산시 웅상읍 용당리 용당마을을 가리킨다. 창(倉)이 있었던 곳이긴 하나 귀빈 숙소 구실도 했다. 통신사 일행이 동래에 입성하기 전 이곳에서 하루 머무는 게 통례였다. 용당 마을 앞뒤에 상당히 긴 구간의 옛길이 남아 있다.
이날은 60리를 갔다.
8월20일(갑진)맑음동래에 닿았다.
십휴정(十休亭)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종사관이 벌써 이르렀다. 같이 5리 길을 가니, 부사 정만순이 의장을 갖추고 국서를 길가에서 맞이하고(후략).
배와 기상 체크 부산진에서 대기
‘십휴정’이란 십휴정 기찰이라고도 했는데 현재의 부산시 부곡동을 말한다. 기찰이란 검문소와 같은 구실을 한 기구로 밀무역자나 밀입국자를 단속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일본이 가까워진 것을 느끼게 해준다. 지금도 이 동네 일대를 ‘기찰’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3사가 다시 만나, 정장을 입고 동래성으로 입성하는 것이다. 동래 읍성은 지금 동래구청 일대이며 향교와 동헌이 남아 있다. 통신사 일행은 일부러 남문으로 들어갔다. 남문이 정문으로 여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마도에 있는 조선통신사 숙소였던 고쿠분사.
부산은 동래에서 20리밖에 안 떨어진 코앞이지만 당시에는 별개의 마을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부산은 부산진을 뜻한다. 부산진 안에는 사신이 머물던 숙소가 있었다. 부산에서는 으레 며칠을 대기했다. 좌수영 선소(조선소)에서 제작하는 배와 순풍이 부는 날을 기다려 대마도를 향해 출항했기 때문이다. 출항 장소는 부산진 앞 영가대다.
영가대(永嘉臺)란 현재 부산시 동구 범일동의 성남초등학교 옆에 있었던 정자의 이름이다. 지금으로서는 믿기 어렵지만, 옛날에는 여기가 바닷가였던 것이다.
대마도 이즈하라에 있는 고려문
이즈하라에 많은 유적들 남아
최익현의 순국비
쓰시마의 중심지이자 영주가 거주하는 도시는 이즈하라(嚴原)라고 한다. 섬의 동남쪽에 있다. 최근까지 이즈하라읍이라는 행정구역이었는데 지난해 쓰시마 통합시가 생기면서 도시 이름이 사라졌다. 통신사 일행을 태운 선단은 먼저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포구인 사스나에 도착한다. 여기서 쓰시마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섬 연안을 시계 방향으로 돌며 여타 포구들을 들르면서 이즈하라까지 간다. 이즈하라에는 대선단이 정박 가능한 항구가 구축되어 있었다. 지금도 그 유구를 볼 수 있다.
이즈하라에는 면암 최익현의 순국비와 고려문 등 조선과 유래가 깊은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통신사 기행을 마무리하기에 이보다 더한 장소는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통신사 일행의 일본 여정은 이제 시작이지만.